Archive»

« 2013/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소망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3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는

절대적 절망의 상태에서, 깊은 갈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것을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은혜와 사랑으로 그런 나를 일방적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어주셨다.


절망도, 갈망도, 은혜도, 사랑도... 도무지 내가 머리로 다 이해해 낼 수 없을 만큼 깊은 것들이지만,

이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 역시...

논리로만 설명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무덤 문이 단단히 닫혀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그 안에 있다고 사람들이 여기던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어둠을 깨뜨리시고 궁극적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들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부활의 기븜을 마음에 담으면서,

나는 오늘과 내일 '소망'에 더 깊이 머물러 있고 싶다.


나로부터 나오는 싸구려 소망이 아니라,

오히려 나로부터 소망이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참된 소망에 머무르고 싶다.


부활절을 넘어서도,

그 부활과 소망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예 그분과 하나가 되어서...

그렇게 살고 싶다.


소망...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사랑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29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그분을 십자가에 붙들어 놓고 있었던 것은 대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도살장의 양과 같이 그렇게 처절하게 처형당하신 성금요일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시는 그 순간,

주님께서 마음에 품으셨던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사랑'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몸과 영혼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주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그것을 버티어 내셨을 것이다.


조건이 없는 사랑 이라는 개념은,

세상 에서 찾아볼 수도, 경험해 볼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그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기란 대단히 어렵다.


오늘 하루,

나는 주님의 처절한 고통속에 담겨져 있던...

그 피묻은 사랑을 마음에 더 깊이 담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안에 더 머물러 있고자 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잠시 좀 제껴두고,

그저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하는 것에 overwhelm 되어보고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은혜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28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은혜란,

정말 말로 안되는 개념이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러면 안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그 이전의 모든 상태를 백지화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억지라도 여겨질수도 있다.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은혜가 아니라면, 

은혜가 아니라면...

도우지 해결할 방법이 없었는데...

도무지 도무지 해결될 방법이 없는 절망의 상태였었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은혜로 모든 것을 뒤집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우리 쪽에서의 반응 조차도 trivialize 시킨다.


은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엎드려 울며 그 은혜에 잠기는 것 뿐이다.


은혜에 걸맞게 살거나,

은혜를 갚거나,

심지어는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것 조차도... 불가능하다.


오늘 하루는,

정말 특히 그 은혜에 깊이 immerse되어 있고 싶다.


도무지 헤아릴수도 감당할수도 없는 그 은혜에,

내 온 존재를 던져놓아 머무르고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갈망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2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비극적일만큼 절망적인 상태의 인간에게도,

그 존재의 깊은 곳에서 부터 나오는 '갈망'이 있기 마련이다.


복음을 알기 전에도,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 어떤 소망, 어떤 그 무엇을 향한 깊은 목마름이 있기 마련이고,

복음을 알고 난 후에도,

그 신비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끊임 없는 갈망이 있다.


내가 복음을 알기 전,

내 내면 속 깊은 곳에서 외쳐나오던 그 '갈망'을 깊이 오늘 하루 마음에 담고자 한다.


내 갈망은 무엇이었던가,

그 갈망을 어떻게 채우려는 헛된 노력을 했던가,

지금... 내 갈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주님을, 주님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그 상태에 오래 머물러 보고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절망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26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하나님 없는 인간은, 절대 절망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는 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상태이다.


아직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이 절망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복음을 깨닫기 난 이후에는,

복음을 알기 전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이었는지 망각하기 십상이다.


오늘 하루는,

내 상태가 하나님 없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던가 하는 것에 깊이 immerse 되어보고자 한다.


아직 복음을 알기 전에,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였던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끊임 없이 반복되는 죄를 돌이켜보며... 지금도 나는 하나님 없이 얼마나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상태인가...


복음의 신비는,

절망의 깊이를 제대로 perceive할때에야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고난 주간을 묵상하지 않기 (?)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25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매년 고난주간에는 나름대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려고 많이 노력을 했었고,

내게 참 큰 유익이 있었다.


그런데,

금년 고난주간에는,

고난을 묵상하기 보다는, 고난을 그냥 마음에 담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그게... 좀 설명하자면 어려운데,


말하자면,

고난이 어떤 것일까,

그 고난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아팠을까,

그 고난의 결과로 내게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가..

등등의 '묵상'은 결국은 대단히 이성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 그 결과로 눈물도 나고 감격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감성적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묵상은 본질적으로 이성적 활동이다.


금년 고난주간에는 그런데,

그런 '이성적' 접근보다는...

그저 그 고난을 마음에 '담는' 것을 해보고 싶다. (too post-modern? ㅎㅎ)


이성적 과정이 전혀 배제될 수는 없더라도,

깊은 기도, 삶에서의 절제, 피동적인 자세의 견지, 그리고 성령의 지배에 vulnerable하게 나를 내어놓는 것과 같은 '자세 잡기'를 통해서,

그 고난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은혜를 머리로 깨닫거나 분석하지 않고,

'heart'에 담아보려고 한다.


여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어서,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내 마음에 정말 한번 '담아' 보고 싶다.

주님을 정말 그렇게 사랑하니까.


그리고,

적어도 부활의 아침을 묵상하기 까지,

'내가 어떻게 하리라'와 같은 결심 혹은 '내가 어떻게 해야한다'와 같은 당위는 당분간 마음에 담지 않고자 한다.


나의 밖으로 부터 내게 주어진 은혜를 충분히 담기 전에,

결심이나 당위로 연결시키는 것은 내 신앙을 shallow하게 만드는 큰 적인 것 같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My Transitions (3)

짧은 생각, 긴 글 | 2013.03.22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4.

내 네번째 transition은,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던 시기였다.

(최근 그것에 대해 좀 쓰기도 했지만..)


대충 2002-2003년 즈음에 그런 transition이 있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정복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회개, 그리고 Lordship에 대한 재정립 이었다.


MIT라는 유명한 학교에서, 그것도 비교적 유명한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마쳐가면서,

내가 세속적 성공/명예에 대한 것이 중독되듯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로 대략 6개월-1년간의 QT 말씀이 나를 그런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던 것 같다.


정말 마음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프고 힘들었었다.

정말 가슴에 불덩어리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오히려 복음의 가치와 충돌하는 방식이었다니...


정복주의적 영역주권론 이라고나 할까...

모든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하니까 모든 영역을 '정복'해 나가야 한다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역시 일종의 '멘붕'이 왔다.


이때 정복주의적 개혁주의 세계관의 대안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고,

공동체, 고난, 순결힘, 산위의 동네... 등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5.

그리고 지금.

대충 작년즈음 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고, 지금 그 transition이 거의 climax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하고 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씨익 웃으시면서, 짜아식.. 아직 멀었다... 얘야 하고 계실른지도 ㅎㅎ)


기본적으로는 내가 내 안에 가지고 있던 '불덩어리'가 그겋게 건강하지 않았다는 반성이 이 transition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vulnerable함, passive함, 은혜, 사랑, 약자의 하나님, 초월성, 자유, 순종, 절제, 듣는 기도 등등의 개념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나면 좀 더 잘 정리가 될 것 같다.)


아직 나는 내가 겪고 있는 transition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렇지만 내 과거의 모습에 대해 통렬하게 아파하고 있고, 기존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대단히 passive하게 그렇게 이끌려가고 있다.

정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Something's really happening to me...


하나님께서는 나를 또 어떤 모습으로 인도하실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My Transitions (2)

짧은 생각, 긴 글 | 2013.03.21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3.

세번째의 transition은, 96-97년 경이었다.

96년 코스타를 다녀온 전후로, 함께 하던 공동체의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다.

생명력 없던 모임에 생명력이 공급되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도의 움직임이 생겼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나는, 새벽에 교회 van을 운전해가며 기도하려는 학생들을 모아 새벽기도를 함께 하는 일을 주도하는 역할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나는 기도에 대해 거의 무지했었는데,

기도를 하다가 방언도 하게 되었고, 일종의 '신비체험'등도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게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는

내가 '기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한동안은,

매일 한시간씩 온몸이 땀에 젖도록 기도를 했었다.

당시 개인적으로는 많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내 개인 기도는 하나도 시키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부흥'에 대한 기도만을 집중적으로 시키셨다.

정말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했었다.


이 transition을 통해서 나는,

기도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이 결코 인간적인 어떤 것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쯤부터 내게,

가슴에 불이 하나 있는 것과 같은 ... 그런 상태가 시작되었는데,

그로부터 15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은 (비록 기복이 있긴 하지만)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My Transitions (1)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2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금년을 시작하면서,
'새해 결심' 시리지의 글을 통해서,

내가 일종의 어떤 'transition'을 겪고 있는 것 같다고 쓴적이 있었다.


정말, 나는 지금, 확실히 어떤 transition을 겪고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아주 일방적으로 나를 drive 해나가시고 계시다는 느낌이다.

몇번의 글을 통해서, 내가 겪었던 transition을 설명하고, 지금 내 transition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1.

내가 겪은 가장 큰 transition은 무엇보다도 회심이었다.

89-90년에 걸쳐 일어났는데,

성경을 연구하다가 겪게 되었다.

은혜, 사랑, 소망, 회복, 하나님 나라, 구원, 성숙 등의 개념등에 사로잡혀,

그야말로 밤낮으로 눈물을 쏟아내었다.

기존에 살았던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일종의 '멘붕'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 아직 새로운 가치관은 제대로 다 세워지지 않았는데, 기존의 가치관은 와르르 무너져내려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2.

두번째로 겪은 transition은, 좀 작은 scale이었는데 92-93년에 일종의 '영적 침체'를 겪으면서 였다.

새롭게 받아들이 복음의 뜨거움이 아직 살아 있는데, 하나님이 예전과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나름대로 말씀 연구, 각종 종교활동등에 열중하기도 했고, 새로운 시도 (신비주의 계열의 기도모임)를 하기도 했었다.

이것은 내 연약함을 잘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신앙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사역자'가 되어갔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거대담론의 missing link?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19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의 '소망'에 대해 거대담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현재의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지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이다.

그 왜곡 때문에 인간을 비롯한 전 피조세계는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왜곡과 고통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 피조세계를 회복/구원시키신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이땅에 보내셨고, 예수의 선포와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제는 회복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지금 비록 고통과 왜곡 속에 살지만, 그것은 이제 회복의 역사 속에서 해결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주어졌다.


음...

그런데,

이거 좋은데...

깨어진 세계, 그 속에서 회복에의 소망... 

그렇다면,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냥 이 피조세계의 회복이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에...

그냥 이 고통/왜곡을 견디어내며 살도록 던져진 것인가?


...


흔히 타락을 회복시키시는 것으로만 복음을 설명할때의 missing link는 '현재'이다.

과거(타락)과 미래(회복)은 설명을 해 주는데,

현재가 어중간하게 잘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복음이 이야기하는 '현재'에 대한 스토리는 이것이다.

임마누엘. God with us.

하나님께서 그 고통속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동행, 그 안에서 그 백성 다운 모습으로 만들어짐,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표현이 이럴땐 더 좋은 것 같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 눈물 속에 함께 하고 계신다고 이야기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자유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18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내가 20여년 전 처음 복음을 내것으로 받아들였을때,

내 본질 자체를 깊이 흔들었던 몇가지 개념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은혜, 하나님의 통치, 회복, 절대적 사랑 등등의 개념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깨달음을 통해서 내게 찾아왔던 가장 깊은 기쁨의 내용은 바로 '자유'였다.

나는 정말 복음을 알고 얼마나 자유로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유케 하는 복음 이라는 내용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도 많고, 부족한 신앙의 깊이에 비해서는 경험도 많고,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

그리고... 물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도 정말 많고.


지난 10여년의 기간 동안,

매년 코스타의 주제를 한해씩 묵상하면서 나는 참 여러가지 신앙의 성숙과 성장을 경험했었다.

어떤때는.. 아니 이런건 좀 묵상 덜해도 될텐데... 싶은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때도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환경과 사람들과 생각등을 통해서 주제를 묵상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많이 나를 들들 볶으셨다. ^^


내가 요즘, 예전과는 좀 다른 color의 묵상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런 묵상이 '자유'라는 내용으로 향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좀 든다.


올해는 아마... 내가 코스타 집회에도 참석을 못할 가능성이 많고,

간사들과 fellowship을 나누는 것도 거의 전혀 못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올해 유난히 심하게 들들 볶으시며 여러 내용들을 묵상하게 하신다.

혼자 떨어져 있더라도 너무 뒤쳐지지 말라는 하나님의 배려일까. ㅎㅎ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15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내가 사는 동네도,

'봄'이라는 시즌이 분명히 있긴 하다.


하루걸러 오던 비가 좀 잦아지고,

기온이 살짝 높아져서 낮에도 가끔 밖에 반팔을 입을 정도가 되면...

그게 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맞았던 봄이나,

보스턴에서 맞았던 봄을 생각해보면...

참 가슴 설레는 기대가 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겨울이 길고 지루한 보스턴에서...

어쩌다 3월이나 4월에 하루 날이 좋으면 사람들이 '오바'해서 얇게 입고 뉴베리 스트리트나, 찰스 강변에 나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 봄이구나... 그런 탄성이 나오게 된다.


내가 사는 이 동네는,

참 날씨가 좋아 감사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아니 솔직히 꽤 자주... 사계절이 그립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 아픔을 공감하기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14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내가 갖는 깊은 갈등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왜 도대체 나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는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가.


내가 깊은 시련과 절망과 고통을 경험한 정도까지만.... 다른 이들의 시련과 절망과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같다.

게다가 나는 내가 조금만 좀 편해지만... 그 고통에 대한 기억을 쉽게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의 아픔에 대해 깊이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을 역시 까~맣~게~ 잊게 되는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

참 마음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는다거나,

마음이 많이 힘들어지는 어려움을 겪는다거나,

혹은 깊은 좌절을 경험하는 시기에야 나는...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철이 들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그래도 잠깐 자랑질은 해야겠기에... ㅋㅋ

비주얼라이제이션? | 2013.03.13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지난 주말,

'동네 애들'이 모여서 하는 Math Olympics에 민우가 학교 대표로 나갔다.

작년에는 computation 분야로 출전해서 상을 받았는데,

금년에는 reasoning 분야로 출전해서 상을 또 받아왔다.


(아 ,참고로, 뒤에 리본 쌓여 있는걸 보면 알겠지만... 사실 참석한 사람의 40% 정도는 대충 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야말로 상을 남발하는 뭐 그런 동네 대회다. 대단한건 아니고... )


감기에 걸려서 그 전전날은 학교에서 조퇴를 할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날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아침도 제대로 못먹고 가서 시험을 봤는데...

그래도 이렇게 상을 받고서는 기분이 좋아한다. 무진장 쑥스러워 하면서 ^^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수학경시대회 뭐 그런것에서 상받은 기억이 없는데...

이런거... 엄마 닮은 건가. ㅋㅋ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강점으로 일하라? 부족한 점은 어쩌라고...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12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성도들을 성추행해서 물의를 일으킨 

J 목사가 예전에 쓴 '강점으로 일하라'라는 책이 있었다.


나는 뭐 그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분의 설교를 꽤 많이 들어보았으므로 어떤 내용이었을지는 대충 알 것 같다. ^^


한편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 사람의 강점을 자꾸 더 develop해서 그것을 이용해서 step-up 해야지, 자신의 부족한 면에 집중하다보면 자꾸만 down 되어서 일을 잘 하기가 어렵다.


사실 소위 'self-help' 혹은 '자기 계발' 계열의 책들이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강점을 잘 활용해서 성공하라고.


사람을, functional unit으로 보면 정말 그렇다.

사람의 존재 목적 자체가 얼마나 제대로 perform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면 정말 그렇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귀중한 존재가 아닐까.


사람은 functional unit 혹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위대한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특히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라면,

이제 평생 자신의 모든 인격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 그분을 닮는 길을 사는 것이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을 걸어가는데에 있어서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부족한 면을 자꾸 깊이 다루시곤 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내 경험에서는 그렇다.)

가령, 내가 참을성이 부족하면, 그걸 평생 포기하지 않으시고 내 삶속에서 끈질기게 다루어내신다.

아니... 이제 좀 그만좀 하시지...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아주 집요하게.. 하나님께서는 내 약점을 깊이 다루어내신다.

왜냐하면, 그 약점 때문에 내 전 존재가 그리스도를 닮는 여정을 가지 못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른 강점이 잘 develop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특정한 약점 하나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영적 성장이 한 걸음도 더 이루저 지지 않는 경우를 참 많이 경험하곤 한다.


목회자의 인간적 야망을 '비전'이라고 치장하는 교회에서 흔히...

'강점으로 일하라'는 식의 message를 많이 듣게 되고,


사람의 본질적 변화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공동체일 수록,

약점을 다루어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우연은 아닌 듯 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용서와 망각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11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제가 지난주에 쓴 글중,

용서를 위해서는 잊는 것이 필요하다는 글에 대해 많은 분들이 No~를 외쳐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몇가지 좀 정리를 한번 해보려고요... ^^


용서는 망각을 필요로 하는가.

아직은 좀 자신이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와 망각이 무관하다는 입장으로 아직 후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용서에 망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에 약간의 배경 설명이 더 필요 할 것 같다.


가령,

사기꾼에게 당해서 재산을 몽땅 날린 일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온 가족이 몇년간 혹독한 고통을 당하고, 온간 수모를 겼었다고 하자.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것은 그 사람에게 매우 큰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를 끄집어내어 확인할 때 마다 그 사람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을 자꾸만 생각하며 미워하게 될 것이고.


여기에서... 나는 그 사기꾼을 잊어버린다거나, 그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났을때, 나와 온 가족이 고생과 수모를 겼었던 그 '상처'를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때 얼마나 그것이 아팠는지.... 하는 그 생생한 기억이 무디어지고 희미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혹은 그 상처의 기억이 상대화되고 trivialize되는 과정을 통해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날카로운 상처의 생생한 기억을 무디게 하는 것은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려 이루어 질 수도 있지만,

'은혜'라는 강력한 해독제가 그 마음 안에 떨어져서,

생생한 상처의 기억을 무디에 만들어서... 혹은 상처의 기억을 상대화시켜서....

용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픈 기억의 상처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의 '인격'을 '은혜'의 과정을 통해 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계속 상처 자체에 연연해서 매달리고 있는 한,

그 상처의 생생한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한,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뭐 자신이 없는 생각이긴 하지만서두,


혹시 좋은 comment, feedback 있으면 좀 주시와요.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Hurried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08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예전 직장에서 일을 할때는,
일이 많긴 했지만, 내가 control할 수 있었고, 그래서 호흡 조절도 가능했었다.

그런데 A사에서 일하면서는,

내가 바쁜 정도를 내가 control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고,

그저 정신없이 위에서 벽돌이 떨어지는데 key를 눌러가며 tetris를 하는 것과 같이 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전 직장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쫓겨서' 살았던 것 같다.

소위 '분주함'이 늘 마음 속에 있었고... 그 분주함을 manage하며 살았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바쁘긴한데,

마음 속에서 더 '분주함'이 넘쳐나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가만 생각해보면...

아마도 올해 새해 결심으로 내가 했던 것 중에,

"passive한 삶"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까지는 새해 결심을 다 까멱고 살고 있지는 않은 듯... ㅎㅎ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요즘은...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0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요즘은,

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고 들어올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대개는 주말에 5일분을 써놓고, 혹시 시간이 되면 들어와서 약간 수정하는 수준으로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가 시원치 않아진게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일까.


뭔가 블로그에 활기도 없는 것 같고.. ㅎㅎ


아직은 설익은 생각을 매일 쓰는 것에 자꾸 회의가 들기도 하고...

게다가 시간도...


자꾸 글쓰기를 계속할지 고민이 많은데...


아직까지는 그저..

몸과 마음이 바빠셔 급한 일로 쫓기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려니...

생각하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사랑이 아젠다가 될때...

짧은 생각, 긴 글 | 2013.03.06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사랑'은 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링은 그것이 '아젠다'가 될때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내 딸을 사랑하는 것을 예를 들어 풀어보자.


나는 내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위해서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그 아이를 향한 사랑에 맞추게 되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도 하고, 사랑과 충돌하는 다른 아젠다들을 없애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딸을 사랑하는 사랑은, 내 삶의 다른 아젠다들과 대결구도를 형성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내 딸을 향한 내 사랑은 하나의 아젠다가 되어 버린다.


즉,

딸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해야하는 high-priority to-do list에 들어가게 되고,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런 과정을 겪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무나도 자주...

내 사랑에서... 내 딸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요소가 희석되게 되고,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가치가 핏기 없고 차가운 아젠다로 전락하게 된다.


글쎄,

모든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나도 자주 사랑을 아젠다로 환원시켜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고 늘 마음에 두고 있는 내 아내나 민우를 향한 사랑도 그렇고,

다른 가족을 위한 사랑이나,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

공동체나 사역을 향한 사랑...

더 나아가서 주님을 향한 사랑 까지도...


나는 자주 내 아내에게,

나는 너를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랑한다...

이렇게 항변하는데,


내 아내는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아마도,

생명 넘치는 사랑을,

아젠다로 환원시켜버리는 내 못된 습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용서를 위해서는 잊어야 하는 걸까?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05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어떤 과정을 통해서 용서가 이루어 지는 걸까?


여러가지 인간적인 오해가 논리적으로 풀려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내게 해를 가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을 갖게 되어서 해결되기도 하고,

혹은 시간이 지나 그 사건/사람/관계 등을 잊게되어 용서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용서받은 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대한 깊은 인식 때문에, 나도 은혜를 베풀게 된다는 것인데...


...


나는,

유난히 한번 화가 나면 잘 풀지 못하고,

내게 잘못한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용서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참 많이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물론 내가 은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다른이들에게 그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용서의 과정을 밟게되는 것을 가만히 살펴 관찰해보면,


결국은 내가 받은 은혜의 크기가 너무 커서,

내게 돌아온 불이익, 피해, 억울함 등등을 trivialize하게 되고,

그래서 그 상처의 날카로움이 '잊혀지는' 과정을 통해서 용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아들여 용서를 하는 과정 역시,

'망각'이 용서의 핵심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즉, 용서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 날카롭게 찔린 것을 '망각'하느냐 하는 것인데...

강력한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고.


나는 잘은 모르지만,

미라슬라브 볼프가 이야기하는 용서도 바로 이런 mechanism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분명한건,

자세한 mechanism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은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따라서 용서가 더 잘 이루어지기는 한다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위험한 상황에서의 마음의 평안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04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아주 좁고 꾸불꾸불한 낭떠러지 길을, 

매우 빠른 속도록 운전해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뭐 뒤에서 악당이 쫓아오는 것과 같은 진부한 예를 들어도 좋겠다. ㅎㅎ)


그럴때,

다음 세가지 경우 가운데 어떤 경우에 가장 마음이 불안할까?


(1) 나와 운전 솜씨가 비슷한 친구가 운전을 하고 있고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아있는 경우


(2) 그래도 꽤 운전솜씨가 괜찮은 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 경우


(3) 세계 최고의 운전사가 (그래서 사고 날 가능성의 0%인) 운전을 하고 있고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


물론 아마 불안한 것부터 평안한 것까지 순서대로 차례를 매기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 (2) > (3)


대개는,

(상황이 어느정도 manageable한 경우에)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나와 비슷한 운전솜씨의 친구가 운전을 하고 있을때보다 더 마음의 평안이 있는 것 같다.

내가 control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런의미에서 더 마음에 평안을 주는것 같다.


그렇지만 그 운전대를 잡은 사람의 솜씨가 절대적이라면, 그 경우에 훨씬 더 마음에 평안이 있을 것이다.


...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어 하거나,

진로의 문제로 힘들어 하거나,

기타 여러가지 위기와 난관을 만났을때 역시...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아무런 control을 잡고 있지 않은 경우 가장 불안하고,

그나마 내가 약간의 control을 잡고 있는 경우 좀 덜 불안하지만...

결국 그 난관을 움직이시는 절대자를 신뢰하는 것만큼 마음에 평안을 주는 option은 없는 것 같다.


이 과정을 가는데 있어서...


절대자의 신뢰를 찾는 과정이...

(1)에서 (3)으로 바로 건너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2)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3)으로 가게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상황에 불안감을 가지곤 하는 겁쟁이 내게 가끔 이렇게 호통을 친다.


야 임마.

좀 일어나서 정신차려!

그리고 뭐라도 좀 해봐.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럼 당장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깊은 골짜기로부터는 나올 수 있을꺼야.


그리고 나서 차차 눈을 들어,

네 삶을 주관하고 계신 절대자를 좀 바라봐.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네 걱정을 끊이질 않을꺼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들개가 된 토끼

긴 생각, 짧은 글 | 2013.03.01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는 어려서부터 참 겁이 많았다.

꽤 커서까지, 세발자전거를 탈 용기가 나지 않아, 한살 아래 여동생이 타면 그 뒤에 쪼그리고 앉아서 탈만큼 겁이 많았다.


그렇게 겁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늘 '안정'을 추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안정'을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key는 공부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거나, 성취감을 느끼거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공부했다기 보다는,

그것이 내게 안정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나서, 그러나... 

나는 대단히 큰 혼란을 겪었다.


그렇게 안정을 제공해준다고 믿었던 공부가,

내 궁극적 소망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한동안 사실 나는 그 새롭게 보게된 진리를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살아온 관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여러 경험들과 깨달음을 통해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야성을 갖게 되었다.


내 궁극적 안정성의 근거가 내게 있거나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지/정/의의 차원에서 인정하며 배워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요즘 내 자신을 보면서...

나는 아직도 여전히 겁이 참 많긴 하지만,

예전에 토끼와 같이 겁이 많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야수와 같은 모습 까지는 아직 되지 못하다고 해도, 적어도 들개 수준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복음은...

정말 사람을 바꾸는 것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eXTReMe Trac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