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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자랑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31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내일은 민우의 생일이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참 여러가지를 누리게 해주셨지만,

민우를 내게 주신것은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다.


정말 철 모르던 어린 시절에, 민우를 갖고, 

정말 철 모르는 아빠로서 민우를 키웠다.

민우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민우는 내가 부족한 아빠노릇을 한것에 비해 참 잘 자라 주었다.


민우는 무엇보다도 참 사려깊은 아이이다.

늘 '다른사람'의 상태와 감정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민우는 성내기를 더디할줄 아는 아이이다.

사춘기, 십대를 지내면서 짜증내고 화나는 일이 왜 많이 있지 않겠나.

그러나 민우는 자신의 그런 부정적 감정을 더디 표현할줄 아는 아이이다.


또, 민우는 밝음을 이해하는 아이이다.

좋은 분위기를 위해서 때로 자신이 망가질줄도 안다. 


섣부른 자기자랑을 하려하지 않고,

'나'가 아닌 '너'가 세상에 존재함을 인식하고 사는 아이인것 같다. ^^


뭐 내가 좋은 아빠가 아님에도 

하나님께서 여태껏 키워 주셨으니...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것으로 믿는다.


민우에게,

"아빠랑 엄마가 민우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제일 많이 이야기 했어?" 라고 물으면 민우는

"Loving Person" 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말 그 말대로,

민우가 나이가 더 들어가고 성숙해감에 따라...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사람들과 세상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더 자라나면 좋겠다.


민우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참 많이 감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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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땡땡이?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3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내가 지난번 A 회사에 다니면서, 그전 H 회사 다닐때 보다 대충 일을 두배쯤 더 했던 것 같다.

지금 이 직장에 다니면서는 지난번 A 회사 다닐때 보다 1.5배쯤 더하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일을 해야하는 특성 상,

아침 일찍에는 유럽이나 동부 사람들과 conference call을 할때가 많고,

밤에는 아시아쪽 사람들과 conference call을 할때가 많다.

그러니 당연히 그 중간에 긴~ 시간동안 일을 할수 밖에 없는 이상한 구조가 되어버린 거다. -.-;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그렇게 전력질주를 하는 식으로 일을 하다간 내가 도저히 견디어내지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낮 시간에 약간 '땡땡이'를 치고 있다.


대개 시간이 나는 대로 한 30분 운동을 하기도 하고, 한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심지어는 어떤때는 두시간 가까운 시간을) 점심시간으로 할애해서 web surfing을 하면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커피 한잔을 들고 conference room에 혼자 들어가서 음악을 듣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잠깐 땡땡이 치는 시간을 내는 게... 내가 계획을 한대로 할 수 있는건 아니고, 하다보면 약간 시간이 비게되고 그때 과감하게 땡땡이를 치는 방식이다.

그러다보니, 낮에 뭐 미리 약속을 해서, 식사를 하면서 사람들과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렵고...

그냥 낮 시간에 시간이 좀 빌때 혼자서 자체 땡땡이를 치는 것만 가능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하기 시작한 이후로, 내 productivity가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내가 일하는 모습이 훨씬 덜 miserable 해졌다. ^^


한편으로는 땡땡이를 치는 것이 좀 찔릴 때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sustainable 하지 않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다보니...

일종의 survival의 한 방편으로서 이렇게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조금씩 쉬면서, 

나름대로 자꾸만 기억하려고 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시면 그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나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호흡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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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설교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29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K 컨퍼런스를 한참 디자인하던 시절,

한동안, 전체집회에서 적어도 한 session은 '평신도'가 message를 하도록 해보자는 원칙을 정했던 적이 있었다.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진 분들은 평신도가 '설교'를 하는 것을 불편해 하시기 때문에,

'설교' 세팅이 아닌 '강의' 세팅의 경우 평신도가 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반복해서 겪었던 어려움은,

평신도 중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이었다.


간혹 평신도들 중에서 집회를 다니는 강사들이 있긴 했지만,

그분들은 대부분 '간증' (그것도 신학적 지향점이 대단히 모호한...)이었지,

말씀을 풀어서 청중의 머리와 가슴에 넣는 설교는 아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설교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의 설교였다.

내가 대학교 4학년때, 불과 스무명 정도나 되었을까 싶은 대전의 작은 개척교회에 오셔서,

김인수 교수님께서 설교를 해주셨었다.

결론적으로는 바로선 평신도가 되라... 뭐 그런 내용이었고, 그러려면 성경을 잘 이해하고 공부해야 한다... 그런 내용이었는데,

정규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던 그 분은, 말씀을 풀어서 참 잘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 설교는 내 삶을 바꾼 설교 가운데 하나였다.


K 컨퍼런스를 디자인 하면서,

아.... 김인수 교수님 세대 이후에 평신도 설교가가 거의 맥이 끊겼구나.... 싶은 생각이 참 많이 들었었다.

그나마 50년대생들 가운데에는 제한적으로 조금 있었는데,

60년대생으로 들어와서는 정말... 그나마도 사실상 전멸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뭐 내가 잘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제 저녁에,

교회 '운영위원회'를 하면서, 평신도 설교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나왔었는데...

이제 어쩌면 70년대생, 80년대생 이후에서 한동안 끊겼던 평신도 설교가들의 명맥이 다시 이어지면 좋겠다...

그리고 이왕이면 여성 설교가들도 좀 나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혼자 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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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Like Jazz를 다시 읽으며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28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교회 소그룹에서,

Blue Like Jazz (재즈처럼 하나님은) 책을 읽으며 sharing을 하고 있다.

덕분에, 문고판으로 예쁘게 되어 있는 한글 책을 한권 사서, 보고 있다.


몇년 전, 영어로 책을 읽었는데, 그때 읽으면서 

아, 참 오랜만에 전도용으로 사용할 만한 책을 찾았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한국말로 다시 읽으니,

음... 왜 이렇게 새롭지? ㅋㅋ


새로 읽으면서,

이 책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었나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요즘 다시 읽으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기독교는,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대화하는 기독교'라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 이 책에서,

자신의 신앙을 세상에 선포하고 전하는 입장으로 스스로를 positioning하기 보다는,

세상과 대화하고 호흡하는 입장으로 스스로를 positioning 하고 있다.


그러나, 

흔히 '종교다원주의자'들이 하는 것 같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식은 아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그 경험이 자신의 신앙에 영향을 미쳐,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인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다가 빠졌던 trap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게 사랑할줄 아는 기독교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그런 힌트를 좀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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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씨앗교회의, 흔한 30대 평신도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2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몇주 전,

ㅇㅈㅇ형제가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설교를 했었다.

나는 그때 out of town 이어서, 그 자리에서 설교를 들을 수 없었지만, 나중에 녹음 file로 들으며 

히야... 정말 이런게 teaching 인데... 싶었다.


어제는,

ㄱㅇㄱ형제가, '신비'에 대한 설교를 했다.

야.... 나름 노트를 하면서 들으려 노력 했으나, 나는 설교에 빠져들어 노트를 잘 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교인 15명 남짓 한 수준의 정말 작은 개척교회이지만,

이 교회의 그냥 흔한 30대 평신도들은, 참 설교를 잘 한다. ^^


무엇보다도 참 감사한 것은,

이 설교들이 그저 '말'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삶의 분투가 거기에 녹아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 여성 평신도 설교도 좀 들어볼 수 없으려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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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조업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24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재작년이었던가, Tim Cook이 NBC의 Brian Williams와의 인터뷰를 했었다.


Brian Williams가, 왜 apple의 제품을 미국에서 만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Tim Cook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충 내용이 이랬다.)


manufacturing을 하는 것은 그냥 공장을 지어놓으면 되는게 아니다.

언젠가부터, 미국에서는 manufacturing을 하는 infrastructure 자체가 없어져버렸다.


.......


manufacturing을 하는데에는, 

계획을 잘 하고, 그 계획에 맞추어서 실행을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특별히 supply chain이 복잡할수록, planning과 execution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실제로 '제조업'이 살아 있는 나라들 - 한국, 중국, 일본, 대만, 그리고 유럽 쪽에서는 독일... - 의 회사들과 일을 해보면, 이 사람들은 그걸 잘 아는 것 같다.

계획을 정확하게 세우고, 그 계획에 맞추어 실행을 하는 체질이 잘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미국 회사들은...

"그 샘플 언제까지 몇개 보내줄건가요?"

"한 두어주 후에 몇개 보내드리죠. (I'll send you a few in a couple of weeks)"

아니, 그러지 말고, 정확하게 며칠날 몇개를 보내준다고 얘기를 해주셔야죠.

"하는데까지 해보죠, (I'll see what I can do)"


이런 식이다.

나는 정말 완전히 분통이 터지고...


반면, 위에서 말한 나라들에서는 대충 이렇게 온다.

"그 샘플 언제 되나요"?"

"ETA @ San Jose, 10/23, 2 sheets/ condition. 12 conditions"

"각각의 condition을 보내주실 수 있는지요?"

"지금 막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excel sheet 확인하십시오. 세번째 tab이 이번에 실행한 실험에 대한 구체적 결과이고, 네번째 tab에는 분석결과가 들어 있습니다."


완전히 다르다.


Tim Cook이 한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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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3)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23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5.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따라가며 모범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어쩌면 스토리를 잘 못 읽는 것일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그런 아브라함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오래 참으시면서,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어 가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선지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스토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동행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6. 성경에 계속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읽는 것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는,

세대가 지나갈수록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여주시는지 하는 것에 주목하여 읽으면 유익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때,

그런 위대한 인물들의 하나님 이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그 삶의 스토리 안에 개입하셨던 그 하나님...

이제는 그 하나님이 나와도 동행하신다..

라는 방식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잘 읽어내려가면,

pluralistic society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됨이 무엇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더 많은 insight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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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2)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22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3.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의 결단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기로 한 구체적인 배경이 성경에 다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것은, 큰 믿음을 가지고 창조주를 따르기로 결심했다기 보다는, 

여러신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따르다가 결국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이 자신의 security로부터 detach되는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것이다.


4. 아브라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처음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것,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것 등등 모든 행동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신앙고백이었다기 보다는, 

그저 자신이 섬기는 신에대한, 그 당시 통용되던 방식으로 충성을 보이는 행위였을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꽤 엉성하고 허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 후에는 상당히 깊은 회의/depression/혼란 가운데 있었던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계속 동행해가면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수준까지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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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1)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21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벌써 몇주 지나긴 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묵상 본문이었다.


몇년 전, 아브라함을 성경 본문을 공부하면서 참 여러가지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아브라함을 읽는 방식을 좀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1. 나는 아브라함을 '위인'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브라함은 '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던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 communicate하시면서 그 사람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그 믿음의 내용을 잘 demonstrate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우리를 대표할만큼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그 믿음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믿음의 조상이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에대한 사전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지방에서 살았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이 '다신교적 상황'에 놓여있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애굽을 하는 백성들에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출신이라고 이야기하는 background에는, 아브라함이... 그저 다른 사람들이 다 하듯이 다원주의적, 다신교적 상황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지식은 대단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처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어쩌면 그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따르기로 했을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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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힌두교인, 경직된 기독교인(?)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2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내 보스는, 인도사람이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Americanize되어서, 고기도 잘 먹고...

그 아내도 인도 사람이 아니라 Chinese Cambodian이다.


깊이 이야기를 해볼 기회는 아직 없었지만,

이 사람은 그렇지만, 소위 'Hindi Philosophy' 스터디 모임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등...

나름대로 다소 'liberal한(?)' 힌두교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최근에,

내가 다루는 회사 하나가 약속을 잘 지키지않고, 거짓말을 하고, accountability를 보여주지 않아서, 내가 좀 심하게 upset한 경우가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조목조목 그 사람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해가며 매일 체크를 하고, date review를 해 가면서 그 사람들이 가지는 논리적 오류들을 지적해내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conference call에 내 boss가 들어오더니만, 그 사람들을 많이 도닥여주고, '인정'해주었다.


나는 다소 열이 받았다. 그래서 내 boss와 언쟁을 벌였다. -.-;


음... 그런데...


논리적인 정확함과 치밀함, fact에 근거한 argument는, 당연히 내가 앞섰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상황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려는 자세는 내 내 보스가 훨씬 뛰어났다.


논리적 치밀함을 통해서 결론에 도달하려는, 분석적 방법이 내 접근이었다면,

논리적 치밀함을 포기하더라도, 심지어는 누가 옳고 그른가를 가리는 일을 포기하더라도, 결국 상생하며 그 사람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는 일이 되게하는 것이 내 보스의 접근법이었다.


그 사람의 그런 접근법이, 그 사람의 힌두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자신의 힌두교적 세계관과 자신의 일을 '통합' (삶과 신앙의 통합!)을 하려는 시도를 얼마나 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경직된 그리스도인인 나와,

유연한 힌두교인인 내 보스를 대비시켜 생각해보며,


내가 추구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특정 방식에 대한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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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0)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여기 담긴 생각들을 좀 더 제대로 잘 풀어내려면,

적어도 20-30번에 걸친 시리즈의 글을 써야만 될 것 같은데...


음...

사실 도저히 그럴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어 대단히 주마간산 격으로 정리해 보았다.


사실 여기에 comment나 댓글, 질문 같은 것들이 좀 달리면 그것을 계기로 생각을 좀 더 발전시키거나 elaborate 해보려고 생각을하고 있었는데, 

글이 별로 였을까... 별 comment들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대충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이 세가지 관점을 조금 더 정리해서 표로 만들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 관점들이,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 어느정도 relevancy를 가지는 입장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어디에서 강의를 하거나 설명을 할때 이런 frame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은,

이 관점들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의 삶 속에 세가지 요소가 다 존재할수도 있고, 세가지중 일부만 존재할수도 있다.

또, 어느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phase마다 다른 존재양식을 가질수도 있다.

가령 젊을때는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변혁시키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게된다던지 하는...


뭐 아직은 내 생각이 덜 무르익었다고 생각하므로...

앞으로 몇년 후에 이 framework이 어떻게 변하게될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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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9)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6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 세번째 유형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때 기억해야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다.


우리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존재의 기능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키려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의 빛이 되는 것으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사실 이 관점은,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에서 볼때 매우 make sense 한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선언되었고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해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은 최근에는 N T Wright이 이런 얘기를 매우 많이 한다. 그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What if God is running the show? 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과 가장 잘 align되는 유형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이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격리주의' 이다.

세상과의 대비가 중요한 요소인만큼, 세상과의 분리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가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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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8)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5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세번째 유형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불러내시는 하나님" 이시다.


이 유형에서 생각하는 바는 이것이다.


세상의 타락은 매우 극심하다. 그 어그러진 정도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다.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도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서 세상에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음...

뭐 이런 관점은 결국은 Armish같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 Armish가 생각하는 바가 결국은 그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Armish의 방식이 "틀린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Armish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의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까?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상을 향해서, '기준'이 무엇인지를 broadcast하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그 백성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백성들의 삶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러한 방식은, 

Christopher Wright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과도 align되는 것이고...

적어도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존재의 양식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이고,

개인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될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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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7)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4 07:06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런 두번째 유형은,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믿음의 선배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그 외에도 흑인 노예들, 한국 초기 교회 성도들도 역시 이런 유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도무지 사람(들)의 노력으로는 바뀔 것 같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그저 하늘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


이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다림' 혹은 '하나님을 신뢰함'이 되겠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 상황을 초월하는 초월자가 계시고, 그분이 우리 하나님 이심을 믿는 것이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런 유형이 더 relevant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빈익빈 부익부가 계속 심화되어서, 경제는 발전하지 않아... 청년 실업은 증가하고 있고,

세상의 화려함이 더욱 심해짐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은 증가되는데, 

그 체제 속에서 '노예'로 살거나 아니면 그 체제의 낙오자가 되도록 강요받는 상황.


장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렸고, 

생명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세상.


이런 세상 속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상황 속에서 suffer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홍해가 갈라지기를 기다리며 부르짖는 것.


그래서 초월, 신비, 고난 등의 개념들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패배주의'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suffer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패배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삶도 의미가 없고, 

우리는 그저 낙오자이고 실패자일 뿐이라는 패배주의적 생각은,

이 두번째 유형이 잘 못 제시되었을때 생기는 독소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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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6)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3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소위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우던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의 신비주의자(mystic)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Eugene Thacker는, 그 당시 대부분의 신비주의자들이 나왔던 Alexandria에서 찾고 있었다.


Alexandria는 당시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다.

여러가지 학문이 발달했고, 기술이 진보했으며, 여러 사상과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물론 로마 제국의 중요한 거점 도시로서 경제적인 풍요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일종의 '벽' 혹은 '한계'를 느끼고 '신비'를 찾아 사막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Eugene Thacker는, (이 사람은 허무주의자이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자신의 학생들에게 이 사막의 교부들이 추구했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학생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경험했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사람들의 상태가... 사막의 교부들이 Alexandria를 버리고 신비를 추구했던 그 상황과 비슷한 것일까.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다보면,

결국은 신비 혹은 초월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대면할수 밖에 없다.


그런 초월적인 need가 지금 더 크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나는 기독교에서 신비 혹은 초월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신비 혹은 초월이 적절한 균형을 잃어버린 신비주의나 초월에의 추구가 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또한 생각한다.


이 두번째 견해에 관하여 조금 더 생각해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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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5)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두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나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유형이 훨씬 더 relevancy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가령, 소위 '악덕기업'에 취직해서 다니는 40대의 직장인을 생각해보자. 

뭐 해적선 선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을 보면서는, '악덕기업'에 다닌다고 뭐라고 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이 사람이 그런 악덕기업에 다니지 않고는 할 수 있는 다른 skill set이 별로 없을 수 있다.

20대부터 배우고 해온게 그건데... 뭐 다른 일을 새롭게 하기가 어렵다.

이직을 해보려고 해도, 같은 업종에 있는 다른 회사들의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다들 악덕기업들이다. 심지어는 사장이 독실한 기독교 장로라고 알려진 회사들을 포함해서...

게다가 가족 생활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 교육비, 등등을 결국 이 악덕기업에서 주는 월급으로 살고 있다.  노예와 같이 사는 것 같아, 때려치고 싶다가도, 가족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기 쉽지도 않다.


이런 사람에게...

너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 악덕기업에 다니고 있는거야...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나오는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상당히 야속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홍해가 갈라지기 전까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 이외에는.


체제를 개혁하는 일도, 개선하는 일도...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리고 도무지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변화가 있지 않고는, 그 체제가 변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이럴때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상황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 사실 이 유형에 대해서는 금년초에 '초월적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총 12번에 걸친 시리즈를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이 시리즈에서 다시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몇가지 포인트만 간략하게 더 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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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4)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09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변혁의 방법을 취할 경우, 

다분히 '타협'을 불가피하게 해야할 경우가 있다.


몇년전 코스타 저녁집회에서 어떤 강사가 하셨던 설교중, 엘리야와 오바댜라는 설교가 있었다.

엘리야는, 우리가 다 잘 알듯 아합-이세벨 체제내에서 '광야에서 외쳤던' 선지자였다.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서 승리하기도 했던.

반면, 많은 사람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오바댜라는, '궁내 대신'이었다. 

사실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체제에서 궁내 대신이었으니, 그리고 바알숭배를 자행했던 시대의 고위 관직지였으니...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많은 타협을 해야만 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오바댜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체제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그 체제에 남아 있으면서 그 체제를 변혁시키는 일은 이렇게 타협을 요구할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변절자일까?

과연 어느 선까지 타협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그렇게 타협해가다가 결국은 세상의 '시대정신'에 정복당해버리지는 않을까?


변혁자들이 고민할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또...

사실 변혁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할때,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꾸준히 그리고 오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당장 전체 체제를 바꿀 수 없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그 악한 system에 조금씩 crack을 만들어 가고 변화를 이루어가는 일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변혁자의 가장 위대한 예로 이야기되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그러지 않았던가.

젊은 시절 회심 이후 노예제도 폐지에 평생 자신의 정치 일생을 걸고 살았고 결국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 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흔히,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변혁자들을 밖에서 보면서는...

저게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이야기할수도 있지만,

사실 깨어진 체제 속에 들어가 있다보면, 큰 체제를 당장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조금씩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갈 일들이 참 많이 있다.

정말 작은 일들에 의미가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변혁자들이 또한 생각해야할 또 다른 면은,

세상의 어그러짐을 바로잡으려 할때에는, 그 바로잡는 그 노력으로 인해, 매우 자주, 다른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대기업이 남미의 어느 나라에 공장을 지어 어린이 노동착취를 하고 있다고 하자.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이 그 대기업에게 그 노동착취를 해소하라고 탄원도 하고 시위도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로 그 악덕 대기업은 어린이 노동착취를 개선하기 보다는 그 공장 자체를 닫아버리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어린이 노동착취라는 문제는 해결(?)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가난한 나라에서 그나마도 있던 일자리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변혁자는 그런의미에서, 이상주의자로 남아있기 대단히 어렵다는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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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3)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08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우선,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변혁하시는 하나님이실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framework에서 세상을 변혁(transformation)시키는 복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차드 니버 역시, 이것을 변혁자 그리스도 (Christ, transforming culture)라고 하여 중요한 분류로 사용하였다.


이 입장은, 사실 소위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할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입장을 잘 설명해준 책,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타락-구속"의 원제는 Creation regained 이다.

다시 말하면, 구속은 창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따라서, 창조때 주어진 문화명령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의 체제, 문화 등을 변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을' 이라는 모토가 매우 어울리는 입장이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해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정치, 하나님의 뜻대로 펼쳐지는 경제 등등을 강조하는데, 그 변혁을 이루는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영역에만 신앙을 가두는 이원론의 극복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선한 창조의 회복을 강조한다.


성경에서는 느혜미야 같은 사람이 이런 입장을 대변하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고, 역사적으로는 뭐니뭐니해도,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사람이 이 입장이 표방하는 영웅이다.


음...

내가 사실 대학-대학원때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는 이게 다인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는 몇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우선,

이 입장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주로 '리더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인것 같다.

80년대 개혁주의적 기독교세계관을 비판할때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 변혁 모델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적용 가능한 모델로 보여지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 입장을 이야기하고 소개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세상 삶의 치열함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었던(?) 대학교수들이 주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다보니 이론적 구호로부터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는 한계가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80-90년대 그렇게 '변혁'을 외쳤던 그 당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 뭐 하고 있나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이들은 많은 경우에, 세속화 라는 거대한 물결에 속수 무책으로 휩쓸리게 되었던 것 같다.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인식했지, 그 세상이 우리를 집어 삼킬만큼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이런 변혁의 입장은 흔히, '승리주의' 혹은 '정복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해. 그런데 악한 세력이 동성 결혼을 찬성하려고 해. 그러니까 우리가 세를 더 모으고 정치적 promotion을 통해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법을 만들자.


뭐 이런 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에 권위(authority)를 갖기 보다는,

힘과 number of votes로 세상에 권세(power)를 가지려고 하는 시도이다.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먹게된데는 이런 background가 다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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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2)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0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건 내가 강의등을 할때 많이 차용하는 스토리이지만 여기 한번 또 써본다.

아마 2003년엔가 eKOSTA에 썼던 글에서 나는 처음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니 벌써 내가 여기저기서 우려먹기 시작한지 10년도 더 지난... ㅎㅎ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해적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심하게 망가져있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위의 해적선 비유에서,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 해적선원이 한사람 있다고 하자.

이 해적선원에게는 어떤 가능한 option들이 있을까?


뭐 그냥 교회에서 흔히 듣는 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해적선에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그 해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해적선에서 사랑이 꽃피우도록 사랑하라.

해적선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나타내어라.


음....

뭐 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막상 '해적선'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좋으신 말씀'일 뿐이다.

아주 아주 shallow 하고 superficial한.


그냥 일반적으로 좋은 말씀에 머물것이 아니라면...


나는,

크게 세가지의 viable한 option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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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06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논의가, 나는 그렇게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그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관'이라고 하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이야기를 할때에는, 세상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그것을 한정시킨다.


그런의미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 셰계관'의 아주 일부분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더 넓은 의미로 기독교 셰계관을 다루려면,

사물의 본질, 궁극적 실재 등등이 다루어져야 하고,

당연히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계시의 본질, 고통의 문제... 뭐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 함께 다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에 창조-타락-구속으로 정리되는 세계관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식의 논의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이라기 보다는, 복음과 세상이 interact 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리차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접근한 것처럼,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discussion이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discussion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시리즈의 글을 생각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title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이 기독교 윤리에 대한 지금 현재로서의 내 생각을 좀 정리해볼 생각이다. 


최근에, 동부의 어느 교회에서 강의를 하나 하도록 부탁받고 그것을 준비하면서,

아.... 이거 90분짜리 4-5시간에 나누어서 강의할 기회가 한번 주어진다면,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좀 더 잘 정리해서 풀어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뭐 나는 사실 기독교 윤리, 기독교 세계관 이런 것에 전문가가 전혀 아니므로... 

나 같은 사람이 풀어낼 수 있는 것에 무슨 새로운 것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므로,

신학자, 철학자들이 하는 이론적 사변적 고민보다는 더 application oriented된 이야기는 풀어내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희망적 생각을 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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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과 정직성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03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회사 일의 특성 상, 

대단히 많은 회사들과 technical 혹은 business discussion을 하게된다.


지난 두주동안 내가 cover했던 회사들을 대충 따져 보아도...

8개국의 15여개의 다른 회사들과 각종 discussion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나라별, 대륙별, 지역별 사람들의 문화와 특징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개 실력이 모자르는 회사들의 경우에, 훨씬 덜 정직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충 이렇다.


실력이 모자르면, 대개는 원하신 기간 내에 약속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여러가지 business discussion을 할때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그걸 막기 위해서, 그런 회사들은, 사실을 왜곡, 과장해서 이야기하거나, 심지어는 데이타를 조작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만날때마다,

나는 참 복잡한 생각들을 많이 한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으로부터, 저런 X들은 제대로 본때를 보여줘야해... 뭐 그런 생각 까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살아남는 이 적자생존의 세상에서는,

약자들이 부정직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정직을 compromise 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아, 물론 나는 결코 부정직함을 옹호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다만 그런 상황이 몹시 속쓰리게 느껴진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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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망하면....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02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내가 대학생일때였던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고려는 불교 때문에 망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다.

만일 한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300명 가까이 몰살 당했는데, 정치권은 몇달째 아무것도 안하고 있고,

검찰은 정의, 공의 이런거 다 포기 무시하고 정치활동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고,

경제정의 그런건 개나 줘버려 하는 분위기이고,

사람들은 소망을 잃고 목을 메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청년들은 직장이 없어 노예와 같은 알바라도 하겠다고 달려들고 있고,

집권을 한 사람들은 거짓과 불의를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군대를 간 20대 초반의 아이들이 어이 없이 맞아 죽는 일들이 생기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하게,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세상에 대해 아무도 뭐라 말을 못하고 있고,

미래를 책임져야할 아이들은, 그저 입시, 입시, 입시에 목을 메어 밤 늦게까지 점수 올리는 훈련만을 받고 있고,

교회는 성적 도덕적 타락의 상징이 되어버렸고,

기독교는 개독교라고 일컬어 지는게 이제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처절한 상황의 북한에 대하여 비전을 가지고 체계적 전략적 접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리고 있고,

아니... 이제는 서북청년단도 구성했다고... 허 참.... 그 사람들 죽창으로 빨갱이들 찔럭 죽이겠다고 나서겠군.


이래도 한국이 망한거 아니라고?


이거 다.... 기독교 때문이다.


나, 기독교인이다.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하나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정말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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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신앙와 번영신학

긴 생각, 짧은 글 | 2014.10.01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최근에 지난번 시카고 집회 강의 mp3들을 듣는 중에,

김도현 교수님께서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에 대해 구별해서 설명하신 것이 인상적이었다.


김도현 교수님에 따르면,

기복신앙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혔던 것인데,

예수믿으면 복 받아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신앙이었다.


그러나, 번영신앙/번영신학은, 주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게 먹히는 것인데,

예수믿으면 번영을 누리게 된다는 것으로, 부의 축적=하나님의 blessing이라고 이야기하는 신앙이다.


참 좋은 설명이라고 느껴졌다.


거기에 내 생각을 조금 더 보태어 보자면,

기복신앙은, 그 천박합(shallow)이 문제라면,

번영신앙은, 그 탑욕스러움(greedy)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번영신앙은, 기복신앙보다 훨씬 더 죄질이 나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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