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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긴 글'에 해당되는 글 321

  1. 2015.02.02 감정적 manipulation (3) (2)
  2. 2015.01.30 감정적 manipulation (2)
  3. 2015.01.28 감정적 manipulation (1)
  4. 2014.11.10 Answering questions that nobody asks
  5. 2014.10.23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3)
  6. 2014.10.22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2)
  7. 2014.10.21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1)
  8. 2014.10.17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0) (16)
  9. 2014.10.16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9) (3)
  10. 2014.10.15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8)
  11. 2014.10.14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7) (2)
  12. 2014.10.13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6)
  13. 2014.10.10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5) (1)
  14. 2014.10.09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4)
  15. 2014.10.08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3)
  16. 2014.10.07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2)
  17. 2014.10.06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
  18. 2014.07.25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5)
  19. 2014.07.24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4) (5)
  20. 2014.07.23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3)
  21. 2014.07.22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2)
  22. 2014.07.07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1)
  23. 2014.06.16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10) (2)
  24. 2014.06.13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9)
  25. 2014.06.12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8)
  26. 2014.06.11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7)
  27. 2014.06.10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6) (6)
  28. 2014.06.09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5)
  29. 2014.06.06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4)
  30. 2014.06.05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3)
 

감정적 manipulation (3)

짧은 생각, 긴 글 | 2015.02.02 13: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감정적 manipulation에 빠지는 경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1.어떤 사람이 소위 '은혜를 받는'다. (신앙적 깊은 감동을 체험한다.)

이것은 정말 참된 감동일 수도 있다. 


2. 그 사람이 그렇게 경험한 감동을, 감격적으로 표현하고 나눈다.


3. 그렇게 감격적인 신앙의 표현이, 그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4. 그런 감정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그 감정을 표현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진정한 감동의 결과로 감정을 표현하던 리더가, 그저 신앙의 일상적인 반복의 형태로 그 감정을 표현하게되는 transition을 거친다.


5. 그 감정적 표현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신앙의 본질로 오해하고, 계속 그것을 추구한다.

이때 리더는 그런 대중의 요구에 굴복하여, 감정적 표현을 manipulative하게 사용한다.


6. 결국, 감정적 manipulation을 하는 리더와, 그것을 누리는 consumeristic한 대중이 서로 암묵적인 합의에 이르고, 감정적 manipulation이 신앙표현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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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manipulation (2)

짧은 생각, 긴 글 | 2015.01.3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 역시,

한편으로는 감정적 manipulation을 하는 리더로서,

한편으로는 감정적 manipulation을 누리는 대중의 일원으로서,

그 악순환 아래 있는 사람중 하나이다.


이러한 감정적 manipulation은 많은 악영향이 있지만,

그중 몇가지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진정한, 성령에 의한 감동을 잃어버리게 된다.

감정적 manipulation에 의한 감정적 동요가 에너지드링크 같은 것이라면,

성령에 의한 진정한 감동은 잘 달여놓은 인삼 녹용 보약과도 같다.

보약은 급격한 몸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지만, 중장기적으로 그 몸에 건강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에너지드링크에 의존해서 '순간화력'을 발휘하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나면,

몸 전체를 건강하게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더 튼튼한 사람이되는 것에는 점점 관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좀더 즉각적인 효과만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소비주의적, 피동적 대중을 만들어 낸다.

감정적 manipulation은 결국은 service provider인 리더와, consumer인 대중 사이에 일종의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이루어 진다.

그리고 이 구조는, 계속해서 대중이 리더에 의해 선동당하고 끌려가는 것을 고착시키고,

대중은 소비주의적, 피동적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중이 능동성을 회복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나는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에서 아주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3. 사람과 사역에 대한 건강한 분별력을 잃게 된다.

감정적 manipulation에 의해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 하는 것을 신앙의 척도로 삼거나,

그런 감정적 manipulation을 얼마나 잘 하느냐 하는 것을 리더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 되면,

정말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건강하게 분별해내는 일이 대단히 어려워진다.

그래서 잘못된 리더들이 양산되고, (가령 감정적 manipulation에는 능하지만 신앙적 integrity가 없는)

건강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고 있지 못한 사람에 대한 지혜로운 인도가 불가능해진다.

회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고, 그저 감정적으로 부화뇌동하는 '대중'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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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manipulation (1)

짧은 생각, 긴 글 | 2015.01.28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Christian ministry에 있어서,

감정적으로 대중을 manipulate 하는 것은 독주를 마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리더의 입장에서는 (설교자, 찬양인도자, 기도인도자, 성경공부 리더 등등)

감정적 manipulation을 하면 쉽게 무언가 자신의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착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점점 그런 감정적 manipulation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에 길들여진 대중은, 감정적으로 manipuate 되는 것이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런 cycle이 반복되면,

리더는 대중을 manipulate하고, 대중은 리더에 의해 manipulate 되는 것에 서로 익숙해지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어렵게 된다.


나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런 함정에 깊이 빠져있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하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 잘못된 manipulation의 악순환이 어떻게 끊어질 수 있을지... 해결의 단초가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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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ing questions that nobody asks

짧은 생각, 긴 글 | 2014.11.1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1.

현대 기독교가 답답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질문을 대답하려고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라고 이야기하면...

현대인들은 '어떤 하나님이요?' 라고 묻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고 영원하 살아라 라는 식으로 쏟아내고 나면,

음... 이건 내 관심사는 아니네.. 

그렇게 돌아서버리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 서클 밖의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relevant 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시도가... 일반적으로 실패해가는 것 같아 보인다.


2.

가끔...

내가 성경공부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한다거나, 뭐 기타 다른 세팅에서 이런 저런 강의/설교들을 하고나면...

결국 사람들이 물어보지 않은 질문에 대답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것에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크리스천 서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크리스천들에게도 정말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다루지 못했다는 생각을 할때가 많이 있다.


3. 

Apple에서는,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다고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일단 그것을 갖게 되면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기기를 만든다" 고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복음은, 혹은 진리는,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원하지 않지만,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을 매우 즐겁게 누리게되는 성격이 있지는 않을까.



4.

그렇지만,

내가.... 때로 '청중'과 disconnect 된 것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내 생각이 깊고 innovative 해서라기 보다는, (뭐 당연히 아니지... -.-; )

그저 relevancy를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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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3)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23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5.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따라가며 모범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어쩌면 스토리를 잘 못 읽는 것일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그런 아브라함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오래 참으시면서,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어 가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선지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스토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동행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6. 성경에 계속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읽는 것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는,

세대가 지나갈수록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여주시는지 하는 것에 주목하여 읽으면 유익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때,

그런 위대한 인물들의 하나님 이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그 삶의 스토리 안에 개입하셨던 그 하나님...

이제는 그 하나님이 나와도 동행하신다..

라는 방식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잘 읽어내려가면,

pluralistic society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됨이 무엇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더 많은 insight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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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2)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22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3.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의 결단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기로 한 구체적인 배경이 성경에 다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것은, 큰 믿음을 가지고 창조주를 따르기로 결심했다기 보다는, 

여러신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따르다가 결국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이 자신의 security로부터 detach되는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것이다.


4. 아브라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처음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것,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것 등등 모든 행동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신앙고백이었다기 보다는, 

그저 자신이 섬기는 신에대한, 그 당시 통용되던 방식으로 충성을 보이는 행위였을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꽤 엉성하고 허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 후에는 상당히 깊은 회의/depression/혼란 가운데 있었던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계속 동행해가면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수준까지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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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1)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21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벌써 몇주 지나긴 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묵상 본문이었다.


몇년 전, 아브라함을 성경 본문을 공부하면서 참 여러가지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아브라함을 읽는 방식을 좀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1. 나는 아브라함을 '위인'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브라함은 '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던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 communicate하시면서 그 사람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그 믿음의 내용을 잘 demonstrate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우리를 대표할만큼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그 믿음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믿음의 조상이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에대한 사전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지방에서 살았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이 '다신교적 상황'에 놓여있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애굽을 하는 백성들에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출신이라고 이야기하는 background에는, 아브라함이... 그저 다른 사람들이 다 하듯이 다원주의적, 다신교적 상황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지식은 대단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처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어쩌면 그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따르기로 했을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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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0)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여기 담긴 생각들을 좀 더 제대로 잘 풀어내려면,

적어도 20-30번에 걸친 시리즈의 글을 써야만 될 것 같은데...


음...

사실 도저히 그럴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어 대단히 주마간산 격으로 정리해 보았다.


사실 여기에 comment나 댓글, 질문 같은 것들이 좀 달리면 그것을 계기로 생각을 좀 더 발전시키거나 elaborate 해보려고 생각을하고 있었는데, 

글이 별로 였을까... 별 comment들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대충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이 세가지 관점을 조금 더 정리해서 표로 만들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 관점들이,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 어느정도 relevancy를 가지는 입장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어디에서 강의를 하거나 설명을 할때 이런 frame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은,

이 관점들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의 삶 속에 세가지 요소가 다 존재할수도 있고, 세가지중 일부만 존재할수도 있다.

또, 어느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phase마다 다른 존재양식을 가질수도 있다.

가령 젊을때는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변혁시키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게된다던지 하는...


뭐 아직은 내 생각이 덜 무르익었다고 생각하므로...

앞으로 몇년 후에 이 framework이 어떻게 변하게될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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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9)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6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 세번째 유형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때 기억해야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다.


우리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존재의 기능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키려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의 빛이 되는 것으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사실 이 관점은,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에서 볼때 매우 make sense 한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선언되었고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해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은 최근에는 N T Wright이 이런 얘기를 매우 많이 한다. 그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What if God is running the show? 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과 가장 잘 align되는 유형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이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격리주의' 이다.

세상과의 대비가 중요한 요소인만큼, 세상과의 분리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가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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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8)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5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세번째 유형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불러내시는 하나님" 이시다.


이 유형에서 생각하는 바는 이것이다.


세상의 타락은 매우 극심하다. 그 어그러진 정도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다.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도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서 세상에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음...

뭐 이런 관점은 결국은 Armish같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 Armish가 생각하는 바가 결국은 그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Armish의 방식이 "틀린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Armish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의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까?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상을 향해서, '기준'이 무엇인지를 broadcast하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그 백성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백성들의 삶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러한 방식은, 

Christopher Wright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과도 align되는 것이고...

적어도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존재의 양식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이고,

개인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될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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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7)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4 07:06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런 두번째 유형은,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믿음의 선배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그 외에도 흑인 노예들, 한국 초기 교회 성도들도 역시 이런 유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도무지 사람(들)의 노력으로는 바뀔 것 같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그저 하늘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


이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다림' 혹은 '하나님을 신뢰함'이 되겠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 상황을 초월하는 초월자가 계시고, 그분이 우리 하나님 이심을 믿는 것이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런 유형이 더 relevant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빈익빈 부익부가 계속 심화되어서, 경제는 발전하지 않아... 청년 실업은 증가하고 있고,

세상의 화려함이 더욱 심해짐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은 증가되는데, 

그 체제 속에서 '노예'로 살거나 아니면 그 체제의 낙오자가 되도록 강요받는 상황.


장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렸고, 

생명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세상.


이런 세상 속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상황 속에서 suffer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홍해가 갈라지기를 기다리며 부르짖는 것.


그래서 초월, 신비, 고난 등의 개념들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패배주의'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suffer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패배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삶도 의미가 없고, 

우리는 그저 낙오자이고 실패자일 뿐이라는 패배주의적 생각은,

이 두번째 유형이 잘 못 제시되었을때 생기는 독소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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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6)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3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소위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우던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의 신비주의자(mystic)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Eugene Thacker는, 그 당시 대부분의 신비주의자들이 나왔던 Alexandria에서 찾고 있었다.


Alexandria는 당시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다.

여러가지 학문이 발달했고, 기술이 진보했으며, 여러 사상과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물론 로마 제국의 중요한 거점 도시로서 경제적인 풍요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일종의 '벽' 혹은 '한계'를 느끼고 '신비'를 찾아 사막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Eugene Thacker는, (이 사람은 허무주의자이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자신의 학생들에게 이 사막의 교부들이 추구했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학생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경험했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사람들의 상태가... 사막의 교부들이 Alexandria를 버리고 신비를 추구했던 그 상황과 비슷한 것일까.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다보면,

결국은 신비 혹은 초월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대면할수 밖에 없다.


그런 초월적인 need가 지금 더 크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나는 기독교에서 신비 혹은 초월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신비 혹은 초월이 적절한 균형을 잃어버린 신비주의나 초월에의 추구가 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또한 생각한다.


이 두번째 견해에 관하여 조금 더 생각해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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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5)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1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두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나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유형이 훨씬 더 relevancy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가령, 소위 '악덕기업'에 취직해서 다니는 40대의 직장인을 생각해보자. 

뭐 해적선 선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을 보면서는, '악덕기업'에 다닌다고 뭐라고 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이 사람이 그런 악덕기업에 다니지 않고는 할 수 있는 다른 skill set이 별로 없을 수 있다.

20대부터 배우고 해온게 그건데... 뭐 다른 일을 새롭게 하기가 어렵다.

이직을 해보려고 해도, 같은 업종에 있는 다른 회사들의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다들 악덕기업들이다. 심지어는 사장이 독실한 기독교 장로라고 알려진 회사들을 포함해서...

게다가 가족 생활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 교육비, 등등을 결국 이 악덕기업에서 주는 월급으로 살고 있다.  노예와 같이 사는 것 같아, 때려치고 싶다가도, 가족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기 쉽지도 않다.


이런 사람에게...

너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 악덕기업에 다니고 있는거야...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나오는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상당히 야속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홍해가 갈라지기 전까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 이외에는.


체제를 개혁하는 일도, 개선하는 일도...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리고 도무지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변화가 있지 않고는, 그 체제가 변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이럴때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상황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 사실 이 유형에 대해서는 금년초에 '초월적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총 12번에 걸친 시리즈를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이 시리즈에서 다시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몇가지 포인트만 간략하게 더 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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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4)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09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변혁의 방법을 취할 경우, 

다분히 '타협'을 불가피하게 해야할 경우가 있다.


몇년전 코스타 저녁집회에서 어떤 강사가 하셨던 설교중, 엘리야와 오바댜라는 설교가 있었다.

엘리야는, 우리가 다 잘 알듯 아합-이세벨 체제내에서 '광야에서 외쳤던' 선지자였다.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서 승리하기도 했던.

반면, 많은 사람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오바댜라는, '궁내 대신'이었다. 

사실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체제에서 궁내 대신이었으니, 그리고 바알숭배를 자행했던 시대의 고위 관직지였으니...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많은 타협을 해야만 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오바댜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체제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그 체제에 남아 있으면서 그 체제를 변혁시키는 일은 이렇게 타협을 요구할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변절자일까?

과연 어느 선까지 타협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그렇게 타협해가다가 결국은 세상의 '시대정신'에 정복당해버리지는 않을까?


변혁자들이 고민할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또...

사실 변혁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할때,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꾸준히 그리고 오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당장 전체 체제를 바꿀 수 없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그 악한 system에 조금씩 crack을 만들어 가고 변화를 이루어가는 일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변혁자의 가장 위대한 예로 이야기되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그러지 않았던가.

젊은 시절 회심 이후 노예제도 폐지에 평생 자신의 정치 일생을 걸고 살았고 결국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 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흔히,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변혁자들을 밖에서 보면서는...

저게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이야기할수도 있지만,

사실 깨어진 체제 속에 들어가 있다보면, 큰 체제를 당장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조금씩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갈 일들이 참 많이 있다.

정말 작은 일들에 의미가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변혁자들이 또한 생각해야할 또 다른 면은,

세상의 어그러짐을 바로잡으려 할때에는, 그 바로잡는 그 노력으로 인해, 매우 자주, 다른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대기업이 남미의 어느 나라에 공장을 지어 어린이 노동착취를 하고 있다고 하자.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이 그 대기업에게 그 노동착취를 해소하라고 탄원도 하고 시위도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로 그 악덕 대기업은 어린이 노동착취를 개선하기 보다는 그 공장 자체를 닫아버리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어린이 노동착취라는 문제는 해결(?)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가난한 나라에서 그나마도 있던 일자리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변혁자는 그런의미에서, 이상주의자로 남아있기 대단히 어렵다는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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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3)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08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우선,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변혁하시는 하나님이실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framework에서 세상을 변혁(transformation)시키는 복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차드 니버 역시, 이것을 변혁자 그리스도 (Christ, transforming culture)라고 하여 중요한 분류로 사용하였다.


이 입장은, 사실 소위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할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입장을 잘 설명해준 책,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타락-구속"의 원제는 Creation regained 이다.

다시 말하면, 구속은 창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따라서, 창조때 주어진 문화명령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의 체제, 문화 등을 변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을' 이라는 모토가 매우 어울리는 입장이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해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정치, 하나님의 뜻대로 펼쳐지는 경제 등등을 강조하는데, 그 변혁을 이루는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영역에만 신앙을 가두는 이원론의 극복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선한 창조의 회복을 강조한다.


성경에서는 느혜미야 같은 사람이 이런 입장을 대변하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고, 역사적으로는 뭐니뭐니해도,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사람이 이 입장이 표방하는 영웅이다.


음...

내가 사실 대학-대학원때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는 이게 다인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는 몇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우선,

이 입장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주로 '리더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인것 같다.

80년대 개혁주의적 기독교세계관을 비판할때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 변혁 모델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적용 가능한 모델로 보여지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 입장을 이야기하고 소개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세상 삶의 치열함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었던(?) 대학교수들이 주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다보니 이론적 구호로부터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는 한계가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80-90년대 그렇게 '변혁'을 외쳤던 그 당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 뭐 하고 있나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이들은 많은 경우에, 세속화 라는 거대한 물결에 속수 무책으로 휩쓸리게 되었던 것 같다.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인식했지, 그 세상이 우리를 집어 삼킬만큼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이런 변혁의 입장은 흔히, '승리주의' 혹은 '정복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해. 그런데 악한 세력이 동성 결혼을 찬성하려고 해. 그러니까 우리가 세를 더 모으고 정치적 promotion을 통해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법을 만들자.


뭐 이런 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에 권위(authority)를 갖기 보다는,

힘과 number of votes로 세상에 권세(power)를 가지려고 하는 시도이다.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먹게된데는 이런 background가 다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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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2)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0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건 내가 강의등을 할때 많이 차용하는 스토리이지만 여기 한번 또 써본다.

아마 2003년엔가 eKOSTA에 썼던 글에서 나는 처음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니 벌써 내가 여기저기서 우려먹기 시작한지 10년도 더 지난... ㅎㅎ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해적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심하게 망가져있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위의 해적선 비유에서,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 해적선원이 한사람 있다고 하자.

이 해적선원에게는 어떤 가능한 option들이 있을까?


뭐 그냥 교회에서 흔히 듣는 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해적선에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그 해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해적선에서 사랑이 꽃피우도록 사랑하라.

해적선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나타내어라.


음....

뭐 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막상 '해적선'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좋으신 말씀'일 뿐이다.

아주 아주 shallow 하고 superficial한.


그냥 일반적으로 좋은 말씀에 머물것이 아니라면...


나는,

크게 세가지의 viable한 option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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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

짧은 생각, 긴 글 | 2014.10.06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논의가, 나는 그렇게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그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관'이라고 하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이야기를 할때에는, 세상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그것을 한정시킨다.


그런의미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 셰계관'의 아주 일부분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더 넓은 의미로 기독교 셰계관을 다루려면,

사물의 본질, 궁극적 실재 등등이 다루어져야 하고,

당연히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계시의 본질, 고통의 문제... 뭐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 함께 다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에 창조-타락-구속으로 정리되는 세계관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식의 논의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이라기 보다는, 복음과 세상이 interact 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리차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접근한 것처럼,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discussion이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discussion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시리즈의 글을 생각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title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이 기독교 윤리에 대한 지금 현재로서의 내 생각을 좀 정리해볼 생각이다. 


최근에, 동부의 어느 교회에서 강의를 하나 하도록 부탁받고 그것을 준비하면서,

아.... 이거 90분짜리 4-5시간에 나누어서 강의할 기회가 한번 주어진다면,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좀 더 잘 정리해서 풀어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뭐 나는 사실 기독교 윤리, 기독교 세계관 이런 것에 전문가가 전혀 아니므로... 

나 같은 사람이 풀어낼 수 있는 것에 무슨 새로운 것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므로,

신학자, 철학자들이 하는 이론적 사변적 고민보다는 더 application oriented된 이야기는 풀어내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희망적 생각을 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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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5)

짧은 생각, 긴 글 | 2014.07.25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마지막으로,

이번에 휘튼에 간 것은 2년 만이었다. 

작년에 과일회사에 다니면서 아예 conference 자체를 참석할 수 없었으니...


그런데,

휘튼 구석구석은 정말 내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곳에서 만나는 분들도 참 익숙하고 반가웠다.

한국에서 유명한, 나보다 연배도 위 이신 목사님께서 내게 먼저와서 인사를 청하시기도 하셨다. (완전 민망... 죄송....)


뭐 그도 그럴 것이 96년부터 휘튼에 매년 갔으니...


여러분들과 반갑게 인사도 하고, 늘 그렇듯이 섬기는 사람들 보면서 감동도 받고, 군데군데 모여있는 학생들보며 뭉클하기도 하고...

뭐 그렇게 지내고 밤을 꼬박 새우고 목요일 새벽에 ORD 공항으로 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억.

이거... 너무 내가 모든 것이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많이 편하고 익숙하면, 편하고 익숙한 것에 감추어진 blind spot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오래 코스타를 섬겨오면서 이렇게 그냥 편하고 익숙해져 버렸다면...

그래서 화들짝 위험하다고 느꼈다면... 

- 코스타가 바뀌어야 하는가

- 내가 바뀌어야 하는가

- 둘 다 바뀌어야 하는가

- 내가 코스타를 떠나야 하는가


글쎄....

내게는 무거운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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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4)

짧은 생각, 긴 글 | 2014.07.24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뭐 하루 반짝 참석해놓고 이래저리 길게도 쓴다고 뭐라고 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서두,

뭐 내 블로그니까 내맘이다. ㅎㅎ


어제 글에 이어서...


이번에는 집회 자체는 거의 참석하지 못했고,

공동대표 모임, 간사 모임에 좀 참석했고, 몇분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고, 그리고 중보기도실, 서점 등 다니면서 오랫만에 뵙는 분들 인사다닌게 전부였다.


코스타와 관계된 여러가지 기사들, 사건들, 그리고 facebook이나 다른 포스팅들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해 보았다.


집회 직전에,

문창극 총리후보를 support하는 성명서를 낸 어르신 목사님들도 그 자리에 계셨고,

그것을 보면서 저분들과는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다고 열받아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계셨다.


그중 어떤 분은, 아예 설교 시간에 보수적 정치적 발언을 하시기도 하셨고,

그걸 보고 엄청 열받은 강사님도 계셨다.


그 두가지의 정치적 입장을 놓고 보았을때,

내가 나름대로 가지는 정치적 입장은 비교적 뚜렸하다.

한국 선거에 투표한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내가 처음 선거권을 받은 이후 

92년 대선부터 최근 대선까지 늘 한쪽 후보만을 위해 투표했다.

이 블로그에서 자주 드러내고 쓰지만, 나는 어떤 특정 정치집단은 매우 싫어한다. (한국도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


그러나,

이런 세팅에서 이번에 더욱 많이 고민하게 되는 것은...

과연 이렇게 다른 정치적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안에서 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내가가진 정치적 입장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유일한 신앙적 입장인 것 같아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 나는 그런 입장을 갖는 것은 일종의 오만일 수 있다고 본다.)

적어도 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신앙 자체를 일단 받아줄수는 없는 걸까? 

꼭 저 반대쪽 '빨갱이' 혹은 '꼴통'을 쳐부수고 쓸어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적어도 코스타 세팅에서는,

양쪽의 분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한이 있더라도, 

양쪽의 분들을 다 모시고 우리가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도록 하는 시도를 해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은 코스타 세팅에서 해잴 수 없는 무모한 시도일까?


정치적 입장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느 것이지만,

그런 정치적 입장은 신앙의 하위 개념으로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똘레앙스를 갖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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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3)

짧은 생각, 긴 글 | 2014.07.23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딱 하루 있었는데도,

이런 저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들이 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코스타의 대선배님과의 대화였다.

저녁집회 시간에, 저녁집회를 다 빼먹고, 그분과 열띤 대화를 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그것도 꼬박 서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선배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최근 코스타의 방향 대로라면, 지역교회의 보수적인 목회자들이 자신의 교인들을 거기에 보내는데 우려를 하는 수준이 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오는 어떤 어떤 강사를 보니, 내가 거기 갈 자리는 아니구나 하고 느낄만 하다. 적어도 일정부분의 balance가 필요하다. 적어도 지금은 balance가 많이 깨어진 것 같아 보인다.


내 항변을 정리하면 이렇다.

우선, 지금 방향과 강사 선택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balance는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기계적인 balance를 추구하려고 들다보면 운동성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지금 소위 그 '보수적인 목회자 그룹'의 color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판국이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코스타운동에 함께 하지 않는 젊은 그룹도 있다.

적어도 지금 현재는, 보수적 목회자 그룹이나 개혁적 젊은 그룹 양쪽이 보기에 모두 다 불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취해야만 하는 position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양쪽 중 어느 한쪽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보수적 목회자 그룹의 눈치만을 보거나, 개혁적 젊은 그룹의 눈치만을 보고 있자면 코스타만이 해 낼 수 있는 역할을 놓치게 된다.


가령 86년에 코스타를 시작할 당시, 그 당시 '보수적 어르신들'이라고 할 수 있었던 교단 정치 목사들을 코스타 운동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그분들과의 balance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로서는 젊은 개혁그룹이였던 신복음주의자들이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일으켰고 때로는 날카로운 날을 세워가며 목소리도 높였다.


왜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적용될 수 없다고 보시느냐?


음...

뭐 내 블로그이니까, 당연히 내 주장을 더 길게 썼다. ^^

그분의 말씀과 생각에도 물론 깊이 고려해보고 생각해볼 내용이 있었다.


나중에는 나도 약간 목소리가 커지고 톤이 높아지도록 열띠게 이야기를 했는데,

생각해보면 한참 선배님이신 그분께 버릇없지는 않았는지 후회와 반성이 된다.


그분과의 대화를 한지 3주가 지났는데도, 그 생각이 계속 내 머리에 남아있다.


코스타는 얼마나 '날카로움'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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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2)

짧은 생각, 긴 글 | 2014.07.22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코스타를 섬기는 사람들이 매년 100명 수준은 되지 않나 싶다.

강사, 찬양팀, 어린이코스타 교사, 간사 등등.


그중,

그 사람의 생일이 언제라는걸 알만큼 가까운 사람들은 대충 간사 + 일부 강사님들정도가 아닐까.

그 수를 따져보면 40명 수준?


매년 놀라는건데,

유난히 코스타 집회 기간에는 이 섬기는 사람들의 생일이 많다.


금년에도 따져보니...

적어도 3-4명 정도의 생일이 그 기간에 겹쳐있다.


확률적으로는 40명 중, 그 한주에 생일이 들어있는 사람이 0.8명 정도 있어야 한다. (40명 / 52주)

그런데 4명이라는건, 확률의  자그자치 다섯배나 되는 거다.


흠... 이건 참 흥미롭다. 매년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생일이 그 주에 끼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10년 넘게 자기 생일을 코스타 집회기간중에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네 생일... 내가 더 많이 복되게 해줄께.

네 소중한 섬김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 정말 그건 네게 큰 선물이 될꺼야.


이 사람들의 섬김이 참 복되다.

....


개인적으로,

내 아내, 내 아버지, 내 동생의 생일이 모두 7월 첫째주에 몰려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된지도 모르겠다. ^^


아, 물론 그렇다고 이 기간에 생일 있지 않은 사람은 별로 섬기는거 아니라는건 아니다. ㅎㅎ

이 기간에 생일 있는 사람이 더 섬기는 거라는 얘기도 아니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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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1)

짧은 생각, 긴 글 | 2014.07.0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번 Chicago conference는 수요일 하루만 갔다 왔으므로, 무슨 '후기'어쩌구 쓸만큼 충분히 conference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후기'라고 시리즈를 달수는 없을 것 같고, 그저 '단상들'이라는 시리즈로 몇가지 생각들을 써보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코스타만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있다.

(나는 물론 다른나라 코스타는 잘 모르므로, 미국 코스타가 하고 있는 일들이다.)


1. Counter-cultural한 복음의 내용을 다루는 대중집회.

금년의 주제는 정말 완전히 그런 쪽으로 갈데까지 간 집회라고 할수 있을 것 같다.

'약함'이라...

약함이라는 주제를 정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중집회로 하는 다른 모임, 운동, 집회가 얼마나 있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정말 인기 없을 주제들을 코스타에서는 계속 다루어 왔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 인기없는 주제들을 계속 더 다룰 예정인 듯 하다. ^^

대중집회를 하면서 이렇게 하는건 정말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대중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대중에게 잘 이해시키기도 여럽고, 게다가 이런 주제를 제대로 전달한 대중적 speaker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타를 계속 이 무모한 일들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 우파와 복음주의 좌파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

한국사회는 정치적 이념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분열은 한국 복음주의권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서로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고 소멸시키려 달려들고 있다 

그런데 코스타에는 이 두 그룹이 다 온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렇지만 코스타에서는 너무 양극단에 치우친 분들은 강사로 모시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물론 서로 불편해한다. ^^

그래도 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는 것이 내게는 참 감동인다.


3. '고리타분'한 옛날식 고지식함이 순수함으로 남아 있다.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

여전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가지 자원을 '낭비'해가며 섬기는 일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여전히 기도, 말씀, 그런게 다른 어떤 technique 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4. 평신도 사역에 대한 강조가 계속되고 있다.

대형교회는 대형교회대로, 중소교회는 중소교회대로... 점점 평신도들은 목회자들의 야망을 충종하기위한 도구가 되어버리고 있다.

소위 '목회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는 목회자의 도구 말이다.

정말 복음에 반응해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역의 주체가 되는 평신도를 보는 일이 참 쉽지 않다.

코스타에는 아직 그것이 살아있다.


5.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강조가 있다.

이분법적 이원론으로... 죽어서 천당가는 구원을 강조하는 그룹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노력으로 점진적으로 이 땅을 유토피아를 만들어보자는 자유주의적 그룹도 아니다.

예수의 삶과 선포와 죽음과 부활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음을 믿고 선포하는 그룹이다.

사실 건강한 하나님 나라 신학에 바탕을 두고 이렇게 지속되는 운동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데...

위의 다섯가지가 모두 동시에 이루어지는 집회, 운동이 코스타이다.


코스타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시점에서, 코스타는 유효하다.

그것을 위해 헌신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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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10)

짧은 생각, 긴 글 | 2014.06.16 07:27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번에 나는, 내가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많이 요청을 받았다. ^^

내 아내는 내가 이번에 인디 다녀온 사진들을 보더니, 참 많이 신났네~ 라며 나를 놀렸지만, 

(뭐 사실 신났던 건 사실이긴 하다 ㅎㅎ)

그렇지만 여러가지일로 참 큰 부담들이 있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이 내게는 고통스러웠다.

현장에 가서도, 뭔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특히 지금까지 내게 큰 부담으로 남아 있는 것은,

목요일 저녁 전체 기도모임 인도였다.


나는 그날 저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초청하는 calling을 하라고 부탁을 받았다.

가면서, 간사들이 시키는건, 내가 physically 불가능한게 아니라면 다 하겠다고, 두말 다시 토달지 않고 무조건 기꺼이 하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갔던 터여서, 그것 역시 SURE~ 하며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 그건 내게 큰 마음의 부담이었다.

집회 내내, 복음의 기본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내용이, 적어도 전체 집회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터였다.

결국 나는 뜨거운 찬양의 시간이 끝난 후에 무대에 올라가, 약 10분이 좀 안되는 길이로 짧게 '복음을 소개'하고 그것에 응답하라고 초청을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개떡같은(!) 초청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일어섰다.

그중에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신앙이 없는데 지금 코스타에 데리고 왔다고 이야기하며 나와 상담을 했던 여학생의 그 남자친구도 있었다. (나는 악수례 시간에 그 남자친구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내게 남아 있는 큰 마음의 부담은,

내가 그렇게 짧게 소개한 복음의 내용에, 정말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빠져있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heart가 잘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처럼 뒤끝 길고 소심한 사람에게는....

이런거 정말 오래 간다. -.-;


아, 결국 내가 복음을 짧게 설명하고자 했을때 할 수 있는 수준이 이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었구나...


코스타를 섬기면서 늘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어가시는 방법은 내 사역의 완벽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많은 것을 보게 해 주셨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셨고,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고, 참 많이 울게 하셨고, 많이 뉘우치게 하셨다.


또 다시 하나님께 많은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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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9)

짧은 생각, 긴 글 | 2014.06.13 11:28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복음의 능력과 영광이 많이 망가진 시대에 해야하는 중요한 일은 다음의 몇가지가 아닌가 싶다.


1. 

그 복음의 능력과 영광을 좀 더 경험한 세대가, 포기하지 않고 그 스토리, inspiration, standard, passion을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게 성실하게 전하는 일이다.

그것이 그 다음 세대의 변화를 guarantee 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그 세대에게 pace setter가 되어,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줄 뿐 아니라 보여주는 일을 해야 한다.


2. 

깊이있는 연구와 사색을 통해, 깊이있는 통찰의 열매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

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큰 흐름이 없을 때에는 오히려, 더 깊이 있는 소수에 집중하며, 그들이 깊이있는 통찰의 열매를 맺도록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맺어진 통찰의 열매들은, 혹시 후에 있을 다른 '부흥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부흥의 시대가 얼마나 부정적인 부작용 없이 건강한 영향력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런 침체기에 이루어진 통찰의 열매들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이 망가져 있음을 뼈아프게 아파해야 한다.

이대로 괜찮다. 그냥 여기서 열심히 하면 된다. 는 식으로 기준을 낮추지 말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지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영광이 현저하게 compromise 된 시대라는 것을 반복해서 우리 자신에게 remind 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우리가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전히 KOSTA는 지금 우리에게 유효하다. 의미가 있다.


이런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학생들을 보며 참 많이 울었다.

그 학생들을 섬기는 간사들을 보며 역시 많이 울었다.

그 학생들 손 붙들고 이야기하는 강사님들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계속 더 엎드려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계속 하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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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8)

짧은 생각, 긴 글 | 2014.06.12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수요일 아침,

화요일 설교자 교회에서 오신 부교역자 한분과 아침식사를 하면서 말씀을 좀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분으로부터 "그 교회 자랑"을 많이 들었다. ^^

뭐 이런 세팅에서, 자기 교회 자랑하는 강사들을 많이 보았으므로 대단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 교회 이야기는 들으면서 참 부러운 것들도 많았다.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direction들도 있었지만. ^^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분께 물었다.

지금 그 교회의 모델이, M 목사님이 아니어도 되는 모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M 목사님 자리에 다른 누가 와도 그 보델이 작동할까요?


그분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M 목사님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pace-setter (페이스를 셋하는 사람)은 필요합니다.


그 말은, 내 머리를 띵~ 하고 때렸다.

정말 띵~ 하고, 아주 쎄게 때렸다.


pace setter라.


그래,

비록 그것이 pseudo revival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신앙의 깊은 경험을 한 사람이 해야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pace-setter가 되는 일이겠다.


이 블로그에서도 몇번 언급하긴 했지만,

내게는 깊은 목마름이 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라면, 도대체 그냥 미적지근하게 하나님을 믿는게 불가능한데.

삶에서 compromise를 하면서는 정말 뼈가 녹는것 같이 아파야 하는데.

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목마름이 자신을 바짝바짝 말려야 하는데.

그래서 더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야 하는데...


일차적으로는 나도 더 그렇지 못하고,

내가 주변에서 접하는 크리스천들중 많은 이들은, 아예 그런 것에 관심조차 갖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내게는, 그렇게 너무 유난스럽게 하지 말라고 내게 충고를 하곤 한다.


아니, 어떻게 다른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밍기적 밍기적 사는게 고통스럽게 느껴지질 않는 걸까?

아니, 어떻게 대충 헌신하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타들어가질 않는 걸까?


저들이 경험한 하나님과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하나님은 다른 분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해 내가 해답을 아직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준이 있다면,

나는 그 기준을 가지고, 아직 그 경험과 이해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어도 어떤 특정한 영역에 관한한,

pace setter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부탁하시는 것이 아닐까.


이 시리즈의 첫번째 글에서 이야기한 외로움의 문제가,

이런 일단의 만남과 생각을 통해 많이 정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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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7)

짧은 생각, 긴 글 | 2014.06.11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런 얘기를 쓰면,

나를 아는 사람은 또 저 얘기한다며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진심으로 부흥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어려운 시절을 지날 때에도,

그 부흥에 대한 소망 때문에 아침에 한시간씩 땀을 뻘뻘 흘려가며 기도를 했었다.


이번에 인디에서 만난 학생들의 상태를 보면서,

과연 이런 상태의 학생들을 다시 우리 힘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들때,

정말 하나님께서 다시 이 흐름을 뒤집어주시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부흥이 필요하다는 갈망이 깊어졌다.


흥미롭게도,

이번에 강사로 오신 분중,

소위 old reformed 계열에 계신, 청교도 신앙에 대한 연구를 많이하신 한 목사님과 부흥에 대해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분은,

소위 new reformed 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 Tim Keller 같은 분 조차도 충분히 reformed 스럽지 않다고 불편해하시는 분이시다.

Tim Keller가 이야기하는 Christ-centered preaching 이라는 것이, 복음의 본질을 많이 약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셨다.


내가 청교도신앙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청고도 신앙, 그리고 마틴 로이드-존스 라인의 부흥 신앙등에 비추어 생각해볼때, 아하~ 하고 이해가 많이 되었다.


이분이 생각하시는 바람직한 설교의 모델에 대해 들으면서,

설교와 teaching에서 narrative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 이지만,

한편 아... 이분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그렇게 보실 수 있겠구나 싶어 참 흥미로웠다.


나도 내 나름대로 부흥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을 그분과 나누었고,

또, 나름대로 내 경험들도 그분과 나누었다.

그리고 또한 화요일 저녁 설교로부터 부흥에 대한 어떤 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지 하는 것도 이야기나눌 기회가 있었다.


예전에 조나단 에드워즈 식의 청교도 부흥이 답이라고 생각했던 입장으로부터 지금 나는 좀 더 진화해 있다.

청교도시대의 부흥의 모델은, 부흥의 한가지 형태이지, 부흥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분이 가지고 계신 생각과 내 생각이 모두 다 같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분과의 그 대화는 내 생각을 참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보스턴에서 겪었던 pseudo-revival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부흥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그 경험은, 제 안의 부흥에 대한 갈망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라고 설명했더니 그분도 많이 공감하셨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우리를 꽤 오랫동안, 상당기간 지탱해 주는 것임을 또한 공감했다.

화요일 설교자가 겪은 그 pseudo-revival이 그 설교자와 그 시대의 사역자들을 평생 지금까지 붙들어 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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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6)

짧은 생각, 긴 글 | 2014.06.1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학생들의 열악한 상황을 보면서,

더더욱 내게는...

과연 이런 상황이 우리의 노력으로 개선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는 회의가 밀려온 것이 사실이다.


약간의 희망의 틈이 보이긴 했지만,

과연 이 작은 희망의 씨앗이, 이 거대한 sinking boat를 지탱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학생들의 작은 변화에 감격해 하다가도,

이런 회의나 의구심이 밀려오면 가슴이 막막해져서 혼자 그저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보기도실보다는 침묵기도실을 더 찾았다.


한번은 침묵기도실을 갔더니,

청년사역자로 섬기는 멘토 가운데 한분이 앉아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아, 저 분도 나처럼 이렇게 막막한 마음에 와 앉아 계신 것일까.


그런데 한주 내내 내 마음에 남았던 것은, 화요일 저녁 설교 message 였다.

화요일 저녁 설교는, conference design 상으로는 별로 잘 align된 message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그 설교의 어떤 면들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반복되는 한 구절.

'예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내 귓전에 남았다.


화요일 설교에서, 설교자께서는,

자신이 경험한 'revival'을 언급하시면서, 그 revival의 결과로 이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열매로 나왔다고 말씀하셨다.


우선,

나는 그분이 경험한것이 부흥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분이 그분의 시대에 경험한 일들은, 지금 이 20대가 경험하지 못하고 있던 일들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부흥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pseudo-revival (유사부흥)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유사부흥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렇게 세워진 사람들은 오랫동안, 때로 평생동안, 다른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에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학생들의 세대가 이렇게 지리멸렬한 것을 이 학생들의 책임으로 돌릴수만은 없다.


'유사부흥'의 시대를 겪은, 세대가, 이 학생들에게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들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일수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사부흥'의 시대를 겪은 것은... 바로 지금 내가 속한 세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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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5)

짧은 생각, 긴 글 | 2014.06.09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번 집회를 통해 바라본 우리 학생 대중의 현주소는 정말 절망적일만큼 안타까웠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과연 이 아이들이 믿고 있는것도 기독교 신앙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전반적으로 만연해있는 반지성적 모습,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 종교화/화석화되어 있는 지역교회 속에서 abuse에 가깝게 소모당하고 있는 상황, 미래에 대한 불안을 복음이 아닌 종교로 해결하려는 모습, 세속적 욕망을 종교적으로 포장하고 있는 모습…


도대체 이걸 어디에서부터 손을 보아야하는 걸까 하는 암담함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이런 학생 대중을 우리가 복음으로 섬기는 일은,

거대한 산을 숟가락으로 옮기려는 시도처럼 무모하게까지 느껴졌다.


학생들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종교지도자들에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몇가지 희망을 보았다.


첫째,

그런 와중에도, 소망을 둘 수 있는 아주 소수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능하면 학생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노력을 많이했는데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이 하지는 못했다.) 그런 대화 속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소수가 분명히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든 이 어그러진 세대에서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둘째,

짧은 대화를 통해서도 생각과 방향을 조금씩 바꾸는 가능성을 보았다.

아직은 어린 학생들이므로, 조금 direction을 제시해주면, 영향을 받는 모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을 그냥 다시 돌려보내려니 정말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했다.

그렇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째,

이런 학생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몸이 부서져라 섬기는 간사들을 보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구석에서 그 파란조끼들의 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이 한두번 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마구 따지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섬기는데, 이 학생들을 그냥 이 상태로 두시렵니까.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섬기는 강사님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가슴뛰게 하는 일이었다.

20년 코스타를 참석해오신 내 룸메이트 강사님(ㅎㅎ)이, 학생들 사진을 열심히 찍으시는 모습은 정말 감동이었다. 한때는 머리 숱도 많으시고 훨씬 파릇파릇하셨는데… 정말 한결같으신 분이시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진통제를 먹어가며 섬기시는 분도 만날 수 있었다. 목요일쯤 되어서는 눈에 피로가 가득해졌음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달려드시는 분들을 보는 것은 분명의 소망의 한 자락이었다.


역시, 20대 초반의 학생들이므로, 찬양의 열기가 달랐다.

그야말로 방방 뛰며 찬양을 하면서도 지칠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맨 뒤에 서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또 다른 세대를 그냥 보내실수는 없습니다. 이 친구들을 꼭 붙들어 주십시오. 이 친구들이 이렇게 뜨겁게 찬양하는 것 처럼 당신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세워주십시오.

이 친구들 그냥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꼭, 꼭, 꼭… 좀 붙들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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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4)

짧은 생각, 긴 글 | 2014.06.06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는 방언으로 기도할때가 있다.

그러나 보통 그 방언기도를 많이 누리거나 사용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방언기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 것 같다.

가령, 혼자서 기도를 할때 방언기도를 하는 경우는 참 드물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지속되다보니, 최근에는 방언기도 자체가 잘 나오질 않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나는 방언기도를 추구하는 그런 스타일의 신앙인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런걸 추구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방언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내 기도가 많이 메마르고 있다는 표지처럼 생각되었다.

특히 앞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외로움과 관련되어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KOSTA 집회에 참석해서 간사들과 함께 기도를 하면서 참 오랜만에 방언으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방언기도에 대해 아주 무지한 사람이므로,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번 집회가 내게도 의미있는 집회가 되게 하시려나보다”


앞에서 쓴대로,

영적 메마름과 영적 외로움에 힘들어하던 내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주셨다.


그 선물은,

소위 뜨거움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셨다.

그 많은 생각들을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자신이 없지만, 적어도 내 외로움의 내용과 근거, 그리고 해결책에대한 작은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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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3)

짧은 생각, 긴 글 | 2014.06.05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번에는 ‘말씀’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준비를 해야 했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사실 이미 다른 세팅에서 했던 것이었으므로 내용을 준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full script를 다 써가며 말씀을 준비하는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큰 줄기만을 잡아놓고, 청중의 반응과 상태를 보아가며 내용과 방향을 조절하는 스타일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내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얼굴을 보고 만나기 전에는 ‘발동’이 안걸리기도 한다.


문제는 내가 만들어 놓은 contents에 ‘마음’이 담기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고, 그래야 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맛 없는 음식을 만들어놓고, 그 음식이 맛있다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내어놓아야 하는 주방장같은 모습이 내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이런 증상은 이번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1월에 신시내티의 한 청년부 수양회 말씀 준비를 할때도 마찬가지였다.

내용을 다 준비했는데, 도무지 그 내용이 내 마음에 담기질 않았다.

그 말씀을 보아도 내 마음이 뜨거워지질 않았다.


막상 말씀을 나누는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보니 그 뜨거움이 일부 다시 회복되었으나,

뭔가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현장에서 막 오바를 했다. 감정적으로 청중을 manipulate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것은 내게 대단히 나쁜 영향을 미쳤다. 

아… 결국 이렇게 manipulate하는 싸구려 말씀을 전하고 말았구나 하는 자책이 나를 괴롭게 했다.


이번에 말씀 준비를 하면서, 그리고 conference에 참석할 준비를 하면서 나는 그게 참 두려웠다.

그래서, 내 마음이 담기지 않아도 좋으니 manipulative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여러번 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도 가능하면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냥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결심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 나를 false manipulation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나님께서,

이번에 내 기도를 잘 들어주셨다.

참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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