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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02 박상익 교수 - 프로테스탄티즘과 카톨리시즘
 

박상익 교수 - 프로테스탄티즘과 카톨리시즘

다른이의 생각들 | 2008.02.02 15:52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지난 금요일 연세대에서 한국밀턴학회가 있어서 다녀왔다. 학회가 파하고 저녁 식사 모임 자리에서 참석한 다른 교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 학회에서 나는 특이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잘나서 특이하다는 건 아니니, 내 자랑 늘어 놓을까봐 긴장하시는 분들, 걱정 안 하셔도 된다. 이 학회는 전원이 영문학 전공자이고, 오로지 나 혼자만 서양사 전공자라는 것이다. 나는 원래 오지랖이 넓어서 남의 전공 분야 기웃거리길 좋아한다.

근데, 저녁 식탁에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한 여교수님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분이 원래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교회엘 나갔는데, 외국 여행 중 프랑스의 아비뇽이란 델 가서 그곳 종교 건축물들과 그곳 사람들을 보고 난 다음 감명을 받아 카톨릭으로 개종을 했고, 물론 지금도 성당엘 다닌다고 했다. 자신의 내면이 새롭게, 그분의 직접 표현을 빌자면 "refresh" 되는 느낌을 얻었다고 한다. (영문학 교수니 영어 쓰는 건 눈감아주기로 하자.)

듣자하니 참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중세 말기 카톨릭 교황권이 추잡하게 분열되어, 교황이 로마에 한 명, 아비뇽(당시에는 이탈리아 영토였다)에 한 명 등장했다는 것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얘기다. 이걸 역사 술어로는 교황 대분열(Great Schism)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 여교수께 물어봤다. 아비뇽이라면 그야말로 중세 말기 교황권의 타락과 카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인데, 어떻게 그곳에서 개신교를 버리고 카톨릭으로 개종할 생각을 하게 됐느냐, 너무나 역설적인 일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그 여교수 말하길, 그곳 사람들의 신앙이 너무나 여유 있고 자연스러워 보여서 그게 참 좋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개신교를 카톨릭 교회에서 자라난 곁가지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아주 우아하게 받아넘기더라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 교회에 대한 깊은 실망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주여 믿사옵니다! 할렐루야! 아멘! 예수천당! 불신지옥!하고 오도방정 떠는거 말이다. 품위 같은거와는 거리가 멀다. 솔직히 그건 나도 싫다.)

물론 신앙은 자유이다. 그러니 그 여교수가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건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다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도대체 우리나라 개신 교회에선 신도들에게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어떻게 교육을 시켰길래 그렇게 간단히 평생 다니던 개신교를 포기하고 카톨릭으로 넘어가게 내버려둔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피뜩 머리에 스쳤다.

요사이 카톨릭이 개신교에 비해 세를 얻고 있다고 한다. 개신교는 신도수가 줄어드는데, 카톨릭은 수가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카톨릭이 개신교에 비해 점잖고 수준이 높다는 평을 한다. 목사들보다는 신부들의 지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고, 교회를 부자간에 상속한다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도 카톨릭에서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관점에서 카톨릭을 호의적으로 후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카톨릭은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등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어서 하급 사제들의 일탈이 있을 경우 즉각 이에 대한 일사불란한 통제를 가해 대열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지난 주, 김수환 추기경이 고 심산 김창숙 선생 추도식에서 중인환시리에 유교식으로 두 번 절(再拜)을 한 것도 한국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인 것으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좋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카톨릭이 훨씬 더 포용적이고 수준이 높다는 증거로 간주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점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걸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보기에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는, 여러 해 전 싱가폴 이광요 수상과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 사이에 벌어졌던 "아시아적 가치" 논쟁으로 비유해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싱가폴, 이거 희한한 나라다. 길에다 침을 뱉어도 벌금, 껌을 버려도 벌금, 오줌 누고 변기 물 내리는 버튼을 안 눌러도 벌금, 이런 식이다. 매사를 법으로 일일이 단속한다. 그래서 외국 관광객이 처음 도착하면 참 깨끗하고 인상이 좋다. (이 대목에서 카톨릭을 연상하시는 분, 독해력이 꽤 있는 분이다.) 우리나라? 그건 독자들이 다 아시는 대로다. 지저분하고 공항에서 택시 요금 바가지 씌우고...(물론 이 대목에서는 개신교를 연상하셔야 한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싱가폴의 이광요 식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광요는 싱가폴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적 가치에 의거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보기에는 싱가폴의 도시 환경이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침 안 뱉고 껌 안 버리는 일은 시민의식의 향상을 통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세세한 일까지 강제적으로 규제하는 태도를 우리는 박정희 유신 독재 때부터 신물나게 봐왔다. "한국 놈들은 말로 하면 안 돼. 엽전들은 그저 두들겨 패야 말을 들어먹어..." 요컨대 한국인 또는 아시아인은 자유를 허용하면 안되고 강압적으로 통제를 해야만 일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아시아 각국이 한때 경제적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 개발 독재라나, 뭐라나... 하지만 그게 오래 못 갔다. 아시아권에 들이닥친 IMF 사태로 개발 독재로 재미보던 시절도 모두 가버리고 만 것이다. 요즘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란 말을 아예 입에 달고 다닌다. 아시아적 가치로는 국가 백년대계를 결단코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카 톨릭이 그렇다. 일견 일사불란하고 정돈이 잘 된 것 같지만, 거기에는 계서제(hierarchy)란 게 있어서 곁으로 삐져나오는 가지에 대해서는 적시에 통제가 가해진다. 비유하자면 싱가폴 식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어떤가? 요즘 한국 교회, 아사리 개판 아닌가? 아까도 말한 교회의 부자 세습 같은 건 실로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실로 여고괴담이 아니라, 교회괴담 수준이다. 게다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기본 질서 침해 사례는 일반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실로 자유 만세 아닌가? 그래서 개신교엔 장래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아니라고 본다.

자유민주주의가 서양에서 어떻게 발전했는가. 그게 하루아침에 정착된 것이 아니다. 서양 근대사 수백 년 동안 무수히 시행착오를 겪고 수많은 피를 흘리면서 고생 고생한 끝에 가까스로 얻어진 것이다. 그들이 서양근대사에서 겪었던 혼란과 무질서는 정말 길고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역사 책 읽어보면 다 나온다(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등등).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그것이 오늘의 유럽 사회, 서양 사회를 있게 만들었다.

나는 우리가 거치는 과정도 다 그러한 시행착오의 일부분이라고 본다. 우리는 지금 혼란의 폭풍우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 무질서를 견딜 수 없을 것처럼 지긋지긋하고 심각하게 느끼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무언가 새로운 질서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세습할 정도로 엽기적으로 자유를 악용하는 부류도 있겠지만, 그 자유를 기반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세력도 엄존하기 때문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이라고 말했다. 미국 사회의 경우 악당들은 정말 잔인하고 흉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선 범인 체포할 때 카메라를 들이대면 저고리 뒤집어쓰고 얼굴 가리기 바쁜데, 미국에서는 카메라에다 얼굴 대고 혀를 낼름거리는 자도 있다. 전혀 죄의식이 없다. 마치 악마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정말로 고결한 심성을 가진 인격자 또한 많이 있다. 미국 사회는 선악간의 콘트라스트가 대단히 큰 사회이다. 흰색은 너무나 밝아서 눈이 부실 정도다. 그러나 검정색은 그야말로 블랙홀처럼 깜깜하다.

그러나 아시아는 어떤가? 우치무라 간조는 아시아는 "황혼의 어스름(twilight)"과 같다고 한다. 善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惡도 아닌 것이,.... 흐리멍텅하게 회색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들 대충 남의 눈이 있을 때는 착한 척하다가 남의 눈만 없으면 온갖 못된 짓을 다한다. 특별히 선한 자도 없고, 특별히 악한 자도 없이, 모두 거기가 거기다. 죄의식은 없고 수치심만 있다.(아이들이 즐겨하는 말, "에이, 쪽팔려...")

나는 서양 사회와 아시아 사회의 이런 차이점은 바로 "자유"의 유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시아적 가치"는 참 웃기는 거다. 서양 사람은 인간이고, 그래서 자유가 주어져도 가하고, 아시아 사람은 인간 이하(그럼 원숭인가?)의 존재니, 말 안 들으면 그때마다 몽둥이로 갈겨야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우리 개신교 참 문제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유라는 여건 속에서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중이다. 그 속에서 바야흐로 선과 악 사이의 스펙트럼이 조금씩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서 회색 톤 일색의 단계를 벗어나, 진정으로 진리의 편에 선 세력이 전면에 확고하게 설 날이 올 것이다. 물론 진리에서 벗어난 세력은 더욱 발광하면서 극악성을 발휘할 것이다. 밝은 것은 더욱 밝게, 어두운 것은 더욱 어둡게 될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강력한 기반은 바로 자유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허락하신 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실존적 상황이다. 물론 타락과 일탈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는 복원력도 갖고 있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를 보라.)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주 천천히 돈다. 무질서와 혼란에 설령 분노는 할지라도, 좌절을 할 필요는 없다. 카톨릭에 주눅들 필요 없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비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의 본령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 자유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비전은 교육의 영역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 즉, 아이들에게도 시행착오할 기회를 줘야 한단 말이다. 스스로 깨우친 것만이 가치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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