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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긴 글

모범생

모 범 생 (模 範 生)

권 오 승

사람들이
날보고 모범생이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모님 말씀 거의 어겨본 일이 없고,
하라는 공부 열심히 하고,
한눈 안 팔고,
내 입에서는 정답만이 나오고,
당위(當爲) 앞에선 절대 순종하는.

정말 난 그랬다.
난 모범생이었다.
난, 내 입으론, 항상 정답만을 이야기 했다.
당위 앞에선 항상 절대 순종이었다.
그러나
내가 내뱉는 그 정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내게 요구되는 그 당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모범생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모범생의 모습을 더욱 더 갖추어 가면 갈수록,
나에게 다가오던 그 허탈감.

그런데 어느날,
나는 껍질 속에 있는 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 껍질을 깨고 나가면
훌륭한 모범생의 길로부터 벗어나게 될까봐
난 차마 그 껍질을 깰 수가 없었다.

난 그 껍질 안에서 정말 최고의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난, 진정한 모범생이 되고 싶었다.
완벽한 모범생이.

어느날, 애타게 날 부르는 음성이
나의 두터운 껍질을 뚫고 들려왔다.
작지만 커다란 그 음성이 내 껍질을 깨뜨려 버렸다.

껍질은 깨지고, 나는 그 밖으로 나왔다.
껍질 안에서 철저히 감추고 살았던
내 추악한 모습들.
난, 모범생이 아니었다.
그저 모범생이 하는 말과 행동만을 따라하는
원숭이였을뿐...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그 음성은
내 추악한 모습들을 가슴에 품어주었다.
단단한 껍질 속의 단단한 내 마음으론
단 한번도 흘릴수 없었던
눈물이 흐르고,
난 내 자신에 대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도저히 내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해져버린
내 모습을 그 음성에 맡겼다.


때때로
아직도 청소되지 않은 내 모습,
다시 또 껍질을 만들어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내 자존심이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다시는 그 단단한 껍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이제, 내가 그렇게 바라던 모범생의 모습이
나를 용납해준 그 음성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 지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