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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에 해당되는 글 18

  1. 2011.03.09 사순절을 준비하면서
  2. 2011.02.23 어제의 묵상 (7)
  3. 2011.02.14 Don't Look At Me (4)
  4. 2008.06.04 Are you doing them with Me? (3)
  5. 2008.04.16 Apprentice of Jesus (1)
  6. 2008.04.15 다니엘 9:1-19
  7. 2008.04.09 정보와 묵상
  8. 2008.03.21 당신께 가까이
  9. 2008.03.19 Multi-tasking (3)
  10. 2008.03.19 만일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면...
  11. 2008.03.03 어른이 된다는 것 (2)
  12. 2005.08.09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13. 2005.08.06 많이 듣고, 적게 말하기
  14. 2005.07.29 말씀이 무겁다...
  15. 2004.07.19 비판쟁이
  16. 2004.01.01 내면적 성전, 외면적 성전
  17. 2003.09.01 성전미문의 거지
  18. 1993.10.31 몇가지 묵상
 

사순절을 준비하면서

긴 생각, 짧은 글 | 2011.03.09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Scripture Union에서 사순절(Lent)를 맞이해서, daily devotional을 발행한다.

Journey to the Cross 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rss feed로 받을 수도 있고, 이메일로 받을 수도 있다.

사순절동안 좋은 묵상의 자료가 될 것 같은데,
십자가로 가는 journey를 나도 깊이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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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묵상

긴 생각, 짧은 글 | 2011.02.23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다리를 다친 운동선수가 있었다.
뛰고 싶으나 뛰려고 하면 근육통이 심해 제대로 뛸 수 없었다.
겨우 걸을 수 있을 뿐이었다.

몇년간의 고통스러운 재활훈련을 통해, 그 선수는 다시 뛸 수 있게 되었다.

그 선수는 자신의 그러한 경험을 '훈장'으로 삼아, 부상을 당한 다른 선수들에게 이야기한다.
힘내! 넌 해낼 수 있어! 날 봐. 부상을 이기고 이렇게 뛰고 있잖아.

그러나,
그 선수의 그러한 말은, 부상중에 있는 다른 선수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 어렵게만 할 뿐이다.

부상에서 회복된 그 선수는,
자신이 부상에서 회복되었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
부상을 당했을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하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

나는,
바로... 그 부상에서 회복된 운동선수 같을때가 참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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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Look At Me

긴 생각, 짧은 글 | 2011.02.14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14:11 무리가 바울이 행한 일을 보고서, 루가오니아 말로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왔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리고 그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기 때문이다.

13 성 바깥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성문 앞에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두 사람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다.

14 이 말을 듣고서, 바나바와 바울 두 사도는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외치면서,

15 이렇게 말하였다. "3)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16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이방 민족들이 자기네 방식대로 살아가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17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18 두 사도는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사하지 못하게 겨우 말렸다.

=====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일하면서도,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
마음이 급해지면,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주목해서라도 좀더 성숙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실수를...
정말 많이 범했던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성실하게 섬겼던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점차 거치는 걸림돌이 되어 후배들의 길을 막게 되는 것 같다.

키가 더디 큰다고 성장 홀몬을 잔뜩 주입해서 동물을 키우면 각종 부작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겠다.
더디 크더라도, 자연식을 먹으며 키워야 건강하게 크는데 말이다.

내 실수들을 바라보며...
한없이 내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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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doing them with Me?

긴 생각, 짧은 글 | 2008.06.04 06:53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What I do vs. How I do...

적어도...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하는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이것을 왜 하고 있는지 하는 논리와 이유들은 꽤 든든하게 있는 것 같다.

회사 일을 하는 것,
코스타를 섬기는 것,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것 등등...

그런데,
두주 전 부터는...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It's great to see you're working so hard for me...
but are you doning all that with me?

하나님의 그 질문에... 내 대답이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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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묵상, 신앙

Apprentice of Jesus

성경공부 | 2008.04.16 08:27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마가복음 6장 전반부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일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지난 월요일에는 Stanford의 KCF 형제 자매들과 이 본문을 함께 공부했다.

최근,
여러가지 일로 쫓기면서 마음의 평정도 잃고,
여러 사람들의 요구에 지치기도 하고,
내 자신의 모습에 실망도 하고... 그러고 있었는데,

제자들을 파송해서 사역하게 하시는 본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 본문에서 제자도에 대하여 배울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전하는 내용의 contents, 전하는 자세, 사역자로서의 당당함, 동역의 중요성,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 등등.

지난주엔 많이 바쁘게 지내가다,
이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결국 이것들은 모두 '내 힘'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묵상해 보면서,
과연 제자들은 그렇게 파송을 받아 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을 가져 보았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마을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무엇인가 자신들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리스트들이 잔뜩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런 상황속으로 제자들을 몰아놓으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묵상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현실에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하는 것 같은 상황을 겪여 나가면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바로 그 다음 본문인 3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와서 좀 쉬어라... 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자들이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마치 내가 무엇인가를 다 하고 있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하는 것 같은 책임감을 가지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어서 방방 뛰는 내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건 좋은데... 그러면서 내게 의지하는 법을 배워라" 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하나님 왜 저는 이렇게 일이 많습니까... 그러고 있을때,
그런 모습 조차도 귀엽다(?)는 표정으로 나를 빙긋 웃으시며 바라보시는 것 같은 모습이 본문에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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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9:1-19

긴 생각, 짧은 글 | 2008.04.15 06:35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어제 QT 본분은 다니엘 9장 전반부였다.
지난주 Stanford KCF 모임에서 다니엘 9장 전반부를 나누면서 함께 그렇게 기도하자고 했었는데...

정말 가슴을 후벼파는... 그런 본문이다.
정말....


9: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우스가 1)바빌로니아 나라의 왕이 된 첫 해,

2 곧 그가 통치한 첫 해에, 나 다니엘은 거룩한 책들을 공부하면서, 주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하신 말씀, 곧 예루살렘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한 상태로 있을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3 응답을 들으려고, 나는 금식을 하면서, 베옷을 걸치고, 재를 깔고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간구하였다.

4 나는 주 나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백성의 죄를 고백하고 아뢰었다.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주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언약과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

5 우리가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악한 일을 저지르며, 반역하며, 주님의 계명과 명령을 떠나서 살았습니다.

6 우리는, 주님의 종 예언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과 지도자와 조상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7 주님, 주님께서는 언제나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처럼 낯뜨거운 수치를 당합니다. 유다에 사는 사람이나 예루살렘에 사는 주민이나, 가까운 데나 먼 데, 곧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흩어져 사는 사람이, 주님께서 쫓아내신 그 모든 땅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8 주님, 우리와 우리의 왕과 지도자와 조상이 낯뜨거운 수치를 당한 것은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용서하여 주셨으나,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10 우리가 우리 주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을 시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율법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11 참으로 온 이스라엘이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율법을 어기고 벗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벌과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12 주님은 우리에게 큰 재앙을 내리셔서, 우리와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을 이루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내린 것과 같은 재앙은 하늘 아래 그 어느 곳에서도 없던 것입니다.

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우리에게 미쳤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죄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14 주님께서 재앙을 간직해 두셨다가 우리에게 미치게 하신 것은, 주 우리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의로우신데,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15 강한 손으로 주님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은 명성을 얻으신 주 우리 하나님, 우리가 죄를 짓고,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16 주님, 주님께서 지난 날에 우리를 구하여 주셨으니, 이제 주님의 성 예루살렘 곧 주님의 거룩한 산으로부터 주님의 분노를 떠나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의 죄악 때문에, 예루살렘과 주님의 백성이 우리 주위에 있는 민족들에게 멸시를 받습니다.

17 우리의 하나님, 이제 주님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십시오. 무너진 주님의 성전을 복구하여 주십시오. 성전을 복구하셔서,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해주십시오.

18 나의 하나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눈을 크게 뜨시고, 우리가 황폐해진 것과 주님의 이름을 빛내던 이 도성의 고통을 굽어보아 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19 주님, 들어 주십시오.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만민이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니,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 도성과 이 백성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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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와 묵상

긴 생각, 짧은 글 | 2008.04.09 14:27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1) 적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깊이 있는 묵상/연구/고찰을 하는 것과,
(2) 많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깊지 못한 묵상/연구/고찰을 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문제일까.

내 생각엔 전자, 즉 적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깊이 있는 묵상을 하는 경우가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깊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적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내리는 편향된 결론에 엄청난 확신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향은,
소위 '신앙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내 모습을 스스로 이에 비추어 보며...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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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가까이

여기저기서 가져옴 | 2008.03.21 08:26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당신께 가까이 - 하덕규

 
당신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안에 촛불 하나씩 켜져요
이제 더 이상 어둠을 노래 할수가 없어요
얼마나 쓴 뿌리들이 내안에 있는지
당신은 아셔도 그냥 조용히 웃으시며
내 안에 촛불 하나둘 켜지요

당신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처음 보는 것들을 보아요
모든 것들이 새로운 갓 태어난 어린나비처럼
새롭게 열리는 푸른하늘과
눈부시게 빛나는 저 태양 이제 더 이상
슬픔이 날 어찌하지 못해요

그동안 내속을 흘러 나의 노래가 되었던
하얀 눈물의 강과
내가 숲에서 잊고 살았던 푸른껍데기의
슬프고도 슬픈 무늬와
내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내안에 이름모를
아픔의 모습들조차
당신 앞에선 아무것도 가릴수 없는
벌거숭이가 되네요

때때로 철없는 뒷모습 당신께 보이며
추억이 손짓하는 옛 숲을 향해 달려보고 싶지만
그러나 이제껏 당신처럼 날 사랑하신 이가
아무도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날 위해 죽으신 당신을
나는 이제 이렇게 부르죠
나 . 의 . 주 . 님


오늘...
이 노래의 가사가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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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i-tasking

짧은 생각, 긴 글 | 2008.03.19 10:17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는 늘 멀티 태스킹을 하면서 사는 것 같다.
어느 한 순간을 놓고 봤을때, 내가 어떤 한가지 일만을 하고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한편에서 실험을 돌리면서 생각을 하고 있다.
실험장비가 돌아가는 약 9분 정도 동안 이 글을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에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마친 이후, 그 다음에 어떤 일을 할 것인가가 항상 머리 속에 있기 때문에... (대략 10분-15분 가량의 단위로 시간을 쪼갠다)
어떤 일을 하면서 그 다음 일에 대한 계획도 끊임없이 머리속에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point를 매우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나는 몹시 힘들어 하는 것 같다.
2분만에 이야기할 것을 30분씩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다보면...  혹은 이미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나는 이미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 머리속에 담은 이후에 한참 다른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 다른 생각을 하는 자유조차 대화중에 주어지지 않는다거나 (그 사람이 계속 내 반응을 요구한다든가...) 하면 참 많이 힘들어 하는 듯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직장 동료 한 사람이 와서 3분이나 이야기를 하고 갔다.
내가 다 아는 얘기를 새로운 이야기처럼 하고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 9분만에 마치고 실헝장비로 가야 그 다음 실험을 하고...
그래야 오늘 12시에 예정된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형제와의 점심 식사 이전에 계획된 실험들을 다 마칠 수 있는데...)

어떤 사람과 목적없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잘 하지 못한다.
시간을 10분 간격으로 쪼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루종일 하면서 지내도,
자기전 내 outlook에는 그날 다 끝내지 못한 일들이 8개씩 뜨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때로... 그저 시간을 낭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저 무엇인가를 아뢰는 것을 하지 않는 상태로... 30분이고 1시간이고 그냥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말씀도 읽다가... 눈을 감고 하나님 생각을 하고... 심지어는 그러다 깜빡 졸기도 하고...

그런 시간이 내 삶에 고갈되면,
나는 이내 쫓기는 마음이 되고 불안해하는 듯 하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렇듯,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 사람과 공감하고... 함께 시간을 죽이는 일도 중요한데...

내가 내 생명을 다해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낭비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섬겨야 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낭비할 계획을 미리 좀 짜놓는 것이 필요한 듯 하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도,
시간낭비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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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면...

긴 생각, 짧은 글 | 2008.03.19 09:59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번 고난주간에 하는 묵상의 커다란 theme은,
만일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여러가지를 이야기해볼 수 있지만,
내 마음 속에 드는 가장 큰 몇가지의 내용은,

자유, 어둠으로부터의 해방, 무지에서의 탈출 이다.

진리는 정말 나를 자유하게 했다. 무지 속에서 헤메고 있었을 수도 있었을 내게 생명과 해방과 자유와 깨달음을 주었다.

그 cost가...
예수님의 고난과 피흘리심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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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긴 생각, 짧은 글 | 2008.03.03 09:2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살아가다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대하기 힘든 사람들은,
나보다  어른이거나, 나를 감독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나보다 미숙한 사람이다.
혹은, 분명히 나보다 현저하게 미숙한데 계속해서 나를 가르치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대할때에는, 물론 내가 그런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노력과 무관하게 그런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하기란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런데,
점점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리고 때로 '어른'의 위치에 있거나 다른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내가 섬기고 가르치고 돌보는 사람들이 나에데하여 그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만 점검해보게 된다.

더 어렸을 때에는...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그저 답답하게만 느꼈는데,
이젠 그런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내 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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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짧은 생각, 긴 글 | 2005.08.09 00: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내가 성숙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만 못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동역을 하거나, 사역을 하거나, 그냥 함께 생활을 하거나...

함께 하는 그 사람들이 누가 되었건 간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미숙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미숙한 사람들에게 지나친 성숙함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듯 하다.


어떤 사람이 때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을 해서 내어 놓을 때에도,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미숙함을 깊이 감안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면,

내가 함께 비이성적/감정적이 되는 오류를 많은 경우 피할 수 있는 듯 하다.


반대로, 내가 스스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해서 내어 놓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면,

내 미숙함을 나 자신과 상대에게 스스로 인정하고,

미숙함이 또 다른 미숙함을 낳지 않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듯 하다.


또한 내가 스스로 빠지기 쉬운 착각은,

내가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경우,

내 비뚤어진 성숙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고,

내 미숙함을 성숙함으로 착각하여 멈추지 말아야할 성화에의 노력을 그치게 되기도 한다.

내 부족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기도하고,

나의 작은 인격에의 열매를 크게 과장해서 보는 우스꽝 스러운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내가 이땅에 사는 한,

나의 이러한 미숙함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미숙함이...

계속 나를 힘들게 할수도 있겠지만,

날마다 조금씩, 내 안에서 이 모든 미숙함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넉넉함이 성령 안에서 키워지면 하는 바람이 크다.


세상의 많은 미숙함들을,

내 삶으로 감당하여 지고 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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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묵상, 성숙

많이 듣고, 적게 말하기

긴 생각, 짧은 글 | 2005.08.06 00: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정말,

많이 듣고 적게 말하기 위해서 요즘 참 많이 노력중이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을 아끼고, 줄이고, 절제하고...

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많이 들으려 하는데...


얼마나 내가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참 많이 경험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요즈음 정말 하나님께 적게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들으려고 하는데...


내가 말을 적게하면, 하나님께서 적게 말씀 하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껏 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은,

결국...

내 생각(말) 이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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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묵상, 성숙

말씀이 무겁다...

짧은 생각, 긴 글 | 2005.07.29 00: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요즈음은,

말씀이 매우 무겁다.


이전엔,

말씀을 묵상하면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달콤함을 즐기면서 후루룩 먹는 재미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즈음엔,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한약 보름치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말씀의 작은 passage에 담긴 뜻의 실존적 의미를 내 삶에서 찾아내는 작업이 조금은 버겁게 느껴질만큼,

말씀이 내게 무겁다.


내 삶의 기준과 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가볍고 볼품 없었음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나라 백성 다움을 내 삶에 갖추는 것에 관한한,

난 참 slow learner 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정말 내 삶을 다 쏟아내어서...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 다움을 온전히 이루며 살고싶은 목마름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 처럼 커지기만 한다.


너무...너무...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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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말씀, 묵상

비판쟁이

짧은 생각, 긴 글 | 2004.07.19 00: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그 열매를 보라고...

나의 경우엔, 나에게서 깊은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특히 최근으로 들어올수돌 더?) 많이 ...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 같다.

비판이 갖는 건강한 순작용이 있고,
특히 어떤 사안의 경우엔 비판이 아니고는 도저히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경우도 있거니와 (그 비판의 수용여부는 물론 별도의 문제이다.)
비판이 때로 어떤사람의 '시각' 자체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사람을 '비판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교회' 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비판할 거리들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일반적인 우주적 교회이건 간에.

어떤 이들은,
'요즈음 학생들' 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세우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려 소망이 없다는 둥, 비지성적이라는 둥...

이 '어떤 이들'에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도 매우 '비판쟁이'이니까 말이다.

비판쟁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고...
그래서 너의 personal한 삶에서 그 이슈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을 하고 보면... 그냥 대화가 막힌다.

비판하는 이야기는 늘 구체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개인적 dimension에서의 적용이 빈약하다.
비판을 하며 가르치는 주제로는 이야기거리가 쌓여있지만,
그것을 위해 섬기는 action은 극도로 빈약하다.

비판의 소리들을 다시 분석하여 또 다시 반문하고 캐물어보면,
이들의 비판 역시 '들은것' 일뿐.. '체득한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위해 섬기는 크기가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그것에 대한 비판의 크기보다 항상 더 커야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떤 개인이건, 단체이건,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이 시대의 젊은이이건, 목회자이건... 누구건 간에.
그리고 내가 섬기지 못하는 중에 비판의 생각이 혹시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그 생각을 스스로 정화시키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판쟁이'의 모습을 자꾸만 갖는 것을 보면,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을 내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가슴을 칠 일이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누가복음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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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 성전, 외면적 성전

짧은 생각, 긴 글 | 2004.01.01 00: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오늘 성경공부 중에서 내면적 (보이지 않는) 성전과 외면적 (보이는) 성전의 비교가 계속 제 마음에 맴돌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요.

요즈음은 자꾸만,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실 수 있는...
'외형적 성전', '율법' 등등을 주셨을까.
그 수많은 종교적 규례를, 따라야할 법칙들, 하나님의 뜻을 '상징'하는 많은 물건과 예식들...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깨고자 그리도 노력하셨건만 결국 그것을 깨시지 못하시고 그 많은 종교적 규례들에 의해 오히려 accuse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아니..
도대체 왜 그리 하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수 많은 종교적 규례들을 그리도 두셨을까.

요즈음 자꾸 드는 생각은요,
교육적 필요 때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천년의 시간을 두고서 끊임없이 성전, 제사, 율법 등을 강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를 원하셨다는 거지요.
가령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내면서, 내 수입과 재산의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계속 상기하고 그렇게 살라는 의미에서 십일조 규례를 주신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그 율법적 종교적 기독교가 복음의 생명성을 죽이는 주범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때로 지나친 반형식론적 입장을 취해왔던 것 같습니다.

예배로 마음으로 드리는게 중요하지, 주일 예배라는 형식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십일조도 내 소유의 전체가 하나님 것임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십일조라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기도도 하나님과 대화하고 내 마음을 올려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커다란 교.만. 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요즈음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제가 그런 형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성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을 무시할만큼 예배가 제 살을 지배하는 사람도 아니고,
십일조라는 형식을 무시할만큼 제 재물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도 아니고,
기도의 형식을 무시할만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속에 살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어린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더 엄하게, 많은 rule들에 의해 control하지만
그 아이가 장성해 감에 따라 밤 귀가 시간도 점점 늦추어 주고,
때로는 부모의 credit card를 쓰게 허락해주기도 하고,
일정 나이가 지나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는 것도 허락하는 것 처럼...

어쩌면 제 신앙의 성숙(?)에 따라 때로는 불필요해보이는 형식을 제게 일부러 덧씌울 필요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인데...
너무도 그것을 무시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을을 했었습니다.

글쎄요...
정말 어떤 의미에선... 이젠 '짬밥'도 늘어서...
제가 배운대로 혹은 성경대로 설교가 되지 않으면 설교 자체에 귀를 닫아버리고...
어떤 사람이 성경공부 시간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뒤엎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그런 바리새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정말 빌립보서의 말씀 글자 그대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것을 뼈속 깊이 새기고 사는 것이 참 쉽지 않네요.

겸손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사랑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절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오래 참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온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여러가지로 보아...
적어도 제겐 아직은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외면적 성전'이 때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04년 1월,
http://www.gatebiblestudy.org 보드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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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미문의 거지

짧은 생각, 긴 글 | 2003.09.01 00: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오늘 QT 본문은 사도행전 3장 전반부.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 거지를 베드로와 요한이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는 이야기.

그런데,
정말 graduate student 로서의 내가 성전 미문의 거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주위에 '잘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지도교수며, 우리 분야의 다른 사람등) 나를 바라보며 지나갈 때,
어떻게든 그 사람들의 attention을 끌어보려고 애쓰는...
좋은 논문을 쓴다, 학회에서 좋은 발표를 한다, 결과를 잘 낸다.... 하는 등의 framework에 가두어져서...

성전 미문에서 멀쩡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던 앉은뱅이 거지,
논문도 쓰고 학회 발표도 하면서 이 분야의 잘 나가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내 결과를 좀 봐주세요' 하고 애걸하는 권오승.

성전 미문 거지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돈을 좀 더 받아 볼까 하는 것,
대학원생으로서의 내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명예/돈을 더 받아볼까 하는 것.

그렇지만,
성전 미문의 거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것' 이었듯이,
내게도 정말 필요한 것은 '논문 몇편, 사람들의 관심사, 좋은 결과' 등등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실제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전 미문의 거지 신세를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건데, 그래서 거지가 할 수 있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일을 더 훌륭하게 할 수 있는데...
나는 겨우 사람들의 관심이나 더 끌어보겠다고 버둥버둥 하고 있구나....

그렇게 말씀 묵상을 하고....
지도교수를 만나서 이야기 하다가... 오늘 엄청 깨졌다. ^^ 그러니 금방 엄청 비참해 지더군.

정말 나는 아직 먼 것같다.... 그래도 점점 나아지겠지. ^^

Sometimes it's slow going, but there is knowing
that someday perfect I will be.~

Little by little bit everyday
Little by little bit everyday
Jesus is changing me.
Oh Yes He's chaning me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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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묵상

짧은 생각, 긴 글 | 1993.10.31 23: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1993. 11.
몇가지 묵상들...
권 오 승

- 모세는 살인을 범한 살인범이었다. 그때문에 그는 도망할수 밖에 없었다. 분명 젊은 날에 범한 잘못은 상당기간 그를 자책감에 빠지게 하였을 수도 있고, 스스로에 대해 실망을 하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모세가 그때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양을 치다가 시내산에 이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가 시내산에 이르지 않았던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내가 범한 크고 작은 실수들... 분명 하나님은 그런 구질구질한 것들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 야곱의 장인 라반은 아주 악독한 사람이었다. 야곱을 속여 자기의 두 딸을 다 떠넘기고 야곱의 사랑을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 아마 야곱도 그러한 라반을 좋아했을것 같지는 않다. 아니, 무척 싫어하고 증오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을 위해서’ 성실히 일했다. 그는 라반의 양들을 철저하게 위험으로부터 지켜내었고, 자신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일로 양을 잃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서 잃어버린 양을 보충했다. 그러한 야곱의 덕택으로 라반은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내 직장 상사는 내게 라반과 같이 악독하지도 않다. 또 나와 함께 일했던 학교 실험실 선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나는 야곱처럼 열심히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았다. 그저 내 욕심만 채우고 아슬아슬하게 내 책임만 다 했을 뿐이다. 아니, 더 많은 때에는 그것도 못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실수하여 힘을 잃고 피곤하여 지칠 때
자신에게 실망하여 기운을 잃고 말 때
반복되는 잘못에 고개가 떨궈질 때
더이상 기도마저 드릴 자신이 없을 때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연약한 존재로
지으셔서 나를 낙망케 하시나요

내가 네안에 착한 일을 시작했노라 또한 내가 이루리라
너의 영혼, 낙망치말고 나를 바라라
내가 아름답게 하리라...

이제 가을이 되었다. 이 가을에 한번 더 들어보고 묵상해보고싶은 찬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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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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