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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14) - 맺으며

짧은 생각, 긴 글 | 2011.12.0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어찌보면, 부끄러운 이야기를 몇번에 나누어서 적어 보았다.
뜬금없이 내 회심의 경험을 적게된 동기는, 처음 글에서 썼던 것 처럼,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과, 내가 겪은 회심의 경험에 따르면 이 세대의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세대의 교회와 기독교를 내가 담아내는 것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시지 않는 것일까.
이 특별한 경험을 한 내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일까.
왜 내게는 이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신 것일까.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이 경험을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만일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강렬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다른 이들에게 강력한 하나님과의 대면의 경험을 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내가 도울 여지는 과연 있는 걸까.)

...

나이가 들면,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뭔가 좀 더 clear해 질 것 이라는 기대를, 20여년 전에 했건만, 여전히 나는 clue 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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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13) - 내 회심의 특징/한계

짧은 생각, 긴 글 | 2011.12.06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1. 나는 회심 경험이 강력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경험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신앙이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다.
 
2. 나는 회심 경험이 내 신앙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새로운 경험등을 결국 내 회심경험으로 해석해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는, 나는 매우 보수적이다.

3. 개인적 회심이 매우 중요한 이슈일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도, 어떤 상황이 되었건, 누군가가 '결신'을 하는 모습을 보면... 거의 90% 이상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고인다. 구원 자체가 과정임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회심의 순간이라는 것을 중요하게여기는 이율배반성이 내 신앙 안에 있다.

4. 회심 이후에 경험했던 변화가 나름 매우 큰 것이었다. 따라서, 회심과 변화(성화)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고, 빠른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 경우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5. 내 신앙과 신학이, 내 회심 경험이라는 다소 주관적 경험에 근거하는 부분이 많이 때문에, 내 신앙을 객관화시키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

Gospel Coalition에서, Don Casron, John Piper, Tim Keller 이 세사람이 대담하는 것을 podcast에 올려놓아서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역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대담이었는데...
많이 내가 공감할 수 있었으면서도... 한편 듣고나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그것은.... 이 세사람의 어조가 대충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우리는 복음도 알고, 하나님의 영광도 아는데... 우리처럼 그거 아는 사람 구하기 참 힘드네요.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다 쓸 수도 없는 일이고... 우리처럼 좀 제대로 믿는 사역자들 어디 없나요."

그 세분이 이야기한 내용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희들보다 낫다'는 식의 그런 자세는 참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 회심 경험이,
나를 그런 편견/교만의 함정으로 인도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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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12) - 회심의 지속성/현재성

짧은 생각, 긴 글 | 2011.12.05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만일, 회심이 한번의 '경험'이고,
그 후에는 그로부터 자라가는 과정이라면...

그 회심의 강한 경험을 한것과,
감동적인 영화를 본 것, 책을 읽은 것, 영감있는 강의를 들은 것등과는 어떻게 그 경험에 차이가 나는 것일까.
신앙생활이란 결국, 그 강한 과거의 경험을 곱씹어가면서 그것에 내 삶의 근본이 있음을 기억해나가는 여정일까.

만일 회심을 '과거의 사건'으로 규정한다면,
그 이후의 삶은, 그 과거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강한 결단력과 정신력으로 그 과거의 사건에 걸맞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말 그런가?

회심이후에 내게 생긴 변화는 대충 이런 것들이 있었다.

우선, 매우 사고/생각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것은, 복음이라는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통합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 생긴 변화가 아닌가 싶다.
글로 써서 남기기에..좀 머쓱하긴 하지만, 사실 회심의 경험이후에 나는 학과목의 평균 평점도 더 나아졌다.
그야말로 회심 이후에 비로소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회심 이전에는 글쓰기 한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회심이후에는 글쓰는 일도, 말하는 일도 훨씬 더 쉬워졌다)

그리고, 의지력이 몹시 강해졌다.
정말 결심하고 결심해도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이 많았는데, 회심 이후에는 결심을 하고 그것을 꾸준히 실행에 옮기는것이 훨씬 더 쉬워졌다.
이것은, 회심의 경험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에서 통일성을 갖게되어, 그야말로 내면세계의 질서를 갖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수도 있겠고,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에따라 움직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졌다고 설명할수도 있겠다.

내 지,정,의 모든 면에서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지거나 소멸되지 않고,
지속될 뿐 아니라 오히려 발전하는 것을 경험해왔다.

감동적인 영화나 책, 강연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시간이 지남에따라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런의미에서,
적어도 내게 있어 회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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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11) - 회심과 삶

짧은 생각, 긴 글 | 2011.12.02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회심과 일상과의 관계, 회심과 삶의 여러 영역과의 관계, 회심과 세계관/가치관과의 관계를 생각해볼때,
다음의 두가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번째 그림은, 회심으로부터 바로 파생되어 연결되는 생각/생활/삶/가치관 등이 있고, 신앙이 성숙해가면서 점차적으로 2차, 3차적으로 그것이 발전되어가는 모델이다.
이런 경우에는, 회심은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과거의 사건'이고,  그것으로부터 발전되어나가게되는 일종의 씨앗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두번째 그림은, 생각/생활/삶/가치관등의 모든 영역이 다 회심과 직접적으로 혹은 1차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고는 모델이다.
이런 경우에는, 회심은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 뿐 아니라, 여전히 현재적 사건일수 밖에 없고, 계속해서 돌아가서 점검해야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첫번째 그림과 두번째 그림의 혼합형이 될 가능성이 많지만, 그 근간이 되는 모델이 첫번째인지 두번째 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 경우에는, 매우 명확하게 두번째 그림에 해당한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삶이나 생각에 내적 통일성 (integrity 혹은 internal consistency)가 없다고 느낄때 마다, 혹은 내 삶이나 생각등이 너무 사변적이 되거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회심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과 연관시켜 풀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것이 잘 맞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자신을 '출애굽의 민족'으로 생각하고 반복해서 그 출애굽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했던 구약의 전통이나, 예수의 희생과 죽음, 부활을 반복해서 기념하고 기억하는 신약의 전통이...
첫번째의 그림보다는 두번째의 그림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역시,
내 회심의 경험때문에 내가 가지게된 특정한 관점일까,
그렇지 않으면 모든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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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10) - 회심의 순간?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29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는 과연, 언제 회심을 하게 된 것일까?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였을까?

대학교 3학년 언젠가,
마음 속의 공허함을 발견하고, 성경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였을까?

에베소서에 나타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무릎을 치며 소망을 찾아내었던 그 순간이었을까?

처음 기도를 하면서 눈물이 터지고,
통곡을 하듯 몇시간씩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던 경험을 하던 그 순간이었을까?

어느순간,
내가 나 스스로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던.... 그 순간이었을까?

처음 그 강렬한 경험 후 10년이 지난 때,
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얻어지게된 그 순간이었을까?

태어나서 30년넘게 가지고 있었던 '꿈'을 주님께 드리고,
내 삶의 앞길을 주님께 넘겨드리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직도 온전히 회심하지 못한 것일까?

----

짜장면은 언제부터 짜장면일까?

처음 밀 이삭이 뿌려졌을 때 부터?
그 밀을 수확했을 때 부터?
밀가루로 만들어졌을 때 부터?
중국집에서 그 밀가루를 사들였을때 부터?
면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했을때 부터?
면발을 뽑아내었을때 부터?
면을 익혔을때 부터?
짜장면을 손님이 주문했을때부터?
면과 양념이 섞여졌을때 부터?
그릇에 담겼을 때 부터?
손님의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손님이 짜장면의 맛을 처음 느낄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소화가 되기 시작하는 순간?
소화가 다 되어 배설되는 순간?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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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9) - 회심과 헌신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28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름대로, 내 회심의 경험은, 내 근본을 흔들어놓은, 아니 뒤집어 놓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내가 주체할 수 없을만큼 강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내 회심의 경험이 강렬해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 성향/성품이 그래서일까.

나는 그 회심이후에 아주 '강한 헌신'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반드시 건강한 헌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늘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내가 여전히 이 헌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머리속에 염두에두고 신앙생활을 했다.

만일, 내가 경험한 이 회심이 '진정한' 것이라면, 정말 이 복음이 진리라면, 예수의 사랑이 그렇게 큰 것이라면, 도무지 그럭저럭 사는 option이 내게는 불가능 했다.
그래서 정말 좌충우돌하며 '강한 헌신'을 추구했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절제된(?) 헌신'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만난 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대충 헌신하면서 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진리로 받아들인 이 복음을 진리로 고백하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까지 자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지식이 모자라서, 아직 잘 알지 못해서 건강한/온전한 헌신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혹 있을 수도 있다.
혹은 헌신의 좋은 지침을 얻지 못해 좌충우돌 건강하지 못한 헌신의 모습을 보일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더 깊이 헌신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자신의 죄성에 통곡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 회심의 경험에 따르면, 배교와 헌신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던 걸까?
내가 극단적인 경험을 했기에, 일반적인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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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8) - 회심의 오염, 비종교적 회심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23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처음 복음에 눈을 뜨게 되었을때, 마치 나는 내 마음 속에 커다란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느꼈다.
환한, 어둠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런 빛.

그런데, 점차 '교회생활'을 해 가면서, 그 빛이 일부 가리워지기도 하고, 어두어지기도 하는 것을 경험했다.
이른바, 회심의 오염이다.

물론, 건강한 공동체 생활이 어린 그리스도인이었던 제대로 서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오염은, 공동체생활이 가져다주는 오염이 아니라, 어그러진 종교체제가 내 안의 빛을 자꾸만 꺼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 생활, 혹은 종교 생활이 내게 익숙해 지면서, 나는 그런 종교생활 혹은 교회생활에 의해 오염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내 안의 빛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매우 자주, 내 자신을 종교생활로부터 끄집어 내어, 그 빛 자체에 집중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써놓고 나면, 무슨 대단히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종교생활이 열정적인 내 회심의 경험을 희석시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내 회심 경험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종교인이었다. 세례를 받은.
내 회심 경험은 나를 종교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끄집어 내었고,
그 후에도 내가 종교인으로 안착하고자하는 유혹을 느낄때마다 내 회심의 경험 자체가 희석되고 오염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아...

내 회심 경험은, 대단히 비종교적, 아니 어찌보면 반종교적인 것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회심의 일반적인 성향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게 특별히 일어난 어떤 현상인지는 잘 알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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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7) - 개인적 회심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22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는, 복음을 받아들인 과정이 지극히 개인적이다.
말하자면, 혼자 성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은 셈이다.
지금도 대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가는 어느 겨울날, 추운 기숙사 방에서 혼자 성경책을 읽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누군가가 내게 복음을 소개해 준 것도 아니고,
함게 구도의 길을 걸었던 동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내 신앙은 두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우선, 어떤 '사람'으로부터 지배적으로 받은 영향이 없다. 그래서 사람에 의해 제한되는 경험을 하지 않는 특권을 누렸다. (주변에서 보면, 특별히 신앙적으로 존경하는 한 사람이 뚜렷한 경우, 그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보았다.) 그렇지만, 남들은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나는 꽤 어렵게 얻어야 했던 경우도 많았다. - 나는 그래서 지금도, 어떤 사람을 다짜고짜 신앙적 영웅으로 모시고 따르는 사람/단체/조직 등을 보면 거의 반사적으로 그것에 반대/저항한다.

또, 내 신앙은 다분히 '개인적'이다.
물론 내 회심의 경험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나는 참 좋은 신앙의 공동체를 만났다. 그곳에서 heavenly fellowship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앙의 공동체성에 대한 이해가 많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리고 몇번의 건강한 공동체 경험을 통해서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신앙/회심이 '개인적'이라는 basis는 내 한계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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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6) - 죄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21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죄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전제조건일까.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던 '이성적인 단계'에서나, 그 후에 복음에 빠져들었던 '감정적인 단계' 모두에서,
죄에대한 깊은 회개, 고백 등은 없었다.

내가 죄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된 것은,
그 후에 성경공부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어던 갈등은,
"이렇게도 죄에대한 인식이 희박한데, 과연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긴 한건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에 깊이 감격했지만,
그것은 내 죄를 용서하셨더는 감격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랑 때문이었다.

죄에대한 인식 없이, 십자가의 희생이 어떻게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겐 처음 단계에서는 그 십자가가 '죄의 용서의 도구'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사랑'으로 받아들여졌다.

죄에대한 분명한 인식, 그것에 대한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전제조건일까?

내 초기 회심경험으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시점이 되어서야...
일종의 신비체험과 성경공부를 통해서 죄에대한 더 깊은 인식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내 초기 회심경험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던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죄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확실한 인식 자체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전제가 아니라는 내 생각, 또 그런 내 경험은...
지금 내가 복음을 이해하는 방식, 복음을 전하는 방식,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나 복음에 막 입문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시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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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5) - 개인적 구원, 우주적 구원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18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전통적인 교회와 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인의 죄를 용서하는 것에 근거한 개인적 구원이다.
반면 이머징 교회등에서 새롭게 강조하는 것은 우주적 구원, 하나님 나라, 거대담론이다.

나는 처음 회심의 경험때, 무엇을 받아들였을까?

앞의 글에서 언급한대로, 나는 매우 이성적인 깨달음의 과정을 먼저 거쳤고, 그것에 바로 연이어서 아주 격렬한 감정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먼저 이성적 깨달음을 거칠 때,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성경책은 에베소서였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림이, 거의 충격적일만큼 매력적이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것이라면 정말 소망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이 땅에서의 여러가지 어그러짐이 회복되는 그림을 성경에서 보았다.
그런 차원에서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담론에 먼저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이 이성적 깨달음은, 나를 복음의 길에 들어서게 했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격렬한 감정적 경험을 할때에는,
내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예수의 고난 이었다. 그 고난을 생각하며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까지 창조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도무지 설명되지 않았지만... 그 벅찬 감격에 나도 나를 어떻게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격렬한 감정적 경험은, 나를 복음에 헌신하게 했고, 더 깊이 들어가도록 인도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성적 깨달음 - 하나님 나라 거대담론 - 복음을 받아들임"
"감정적 경험 - 예수의 십자가/고난 - 복음에 헌신함"
이 두가지가 시간차이를 두고 내게 꽤 강력하게 다가 왔는데...

만일
이성적 깨달음 - 하나님 나라 라는 framework만 가지고 있었다면, 깨닫긴 했더라도 헌신하지 못했을 것 같고,
감정적 경험 - 예수의 고난, 이라는 framework만 있었더라면, 일시적으로 헌신했을지 모르나 금방 싫증을 내거나 밑바닥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이 두가지가 모두 꼭 필요한 것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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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4) - 무척 감성적이었다.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17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그러나 또한, 내 회심 경험은 대단히 감성적인 것이었다.
나는 꽤 전형적인 'nerd' 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
매우 '나만의 세계'가 좁은 사람이었고, 내 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거의 배척하는, 그리고 감성을 이성에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 그렇고. ^^)

그런데, 내게 큰 변화가 생겼다.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가 그야말로 쏟아져 들어왔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마다, 도무지 어쩌할 수 없는 감격에,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무슨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게 아니냐고 주변에서 생각할수도 있었을만큼 (다른 이들 몰래 울었기 때문에,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다.) 몇달 동안은, 밤이고 낮이고 울었던 것 같다.
어떤때, 약간 여유(?)가 생기면, 학교 뒷산 같은 곳에 올라가서, 그야말로 통곡을 하면서 엉엉 울기도 했다.
기도를 하다가 울고, 성경을 보다가 울고, 찬양을 부르다 울었다.
좋아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또 망가진 세상을 보며 울고, 망가진 내 모습을 보며 울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희생의 피를 흘리시는 것을 생각하며 울고, 그것을 알아차리지못하는 군중 속에 내가 있음을 보고 울었다.

반면, 참 많이 웃기도 했다.
그야말로, 정말 많이 웃게 되었다. 사람들을 보며 많이 웃었고, 특별히 같은 소망을 품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서는 정말 환하게 많이 웃었다. 
길을 걸어가다가, 길가에 핀 꽃을 보며 감사해서 웃기도 했고, 한끼 식사를 앞에두고 감사해서 크게 웃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햇살에 크게 웃었고,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이전보다 훨씬 더 밝고 크게 웃었다.

그렇게 많이 웃고 우는 것은 그러나...
그 "회심의 기간"동안에만 있다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22-23년이 지난 지금도, 내 회심의 경험 이전의 나에 비하면, 참 많이 웃고, 참 많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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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3) - 무척 이성적이었다.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16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소위 '회심체험'하면 이야기하는 갑자기 뽕 맞는 것(?) 같이 감정적으로 확~ 격양이 되더니 갑자기 신비한 체험을 하고, 감정적으로 뜨거워지고... 하는 식을 떠오르기 쉬운데,
내 경험은 그것과는 꽤 많이 달랐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어려서부터 많이 접해왔던 '복음'이 어느날 '새롭게' 깨달아지게 되었다.
기존에 그저 파편적인 윤리강령 정도로 생각했던 복음의 여러 내용들이 한꺼번에 쭈루룩~ 맞추어 지면서, 정말 '말이 된다'하는 탄성을 터뜨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중에, 꽤 많이 '성경공부'를 하는 과정이 있었다.
글쎄,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하는 문제일 수 있겠지만,
어느순간 성경말씀이 '말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정말 미친듯이(?) 공부를 했었다.
그 당시 기독교서점에 가서, 여러 대학생 선교단체의 성경공부 교재들을 한 20-30권 한꺼번에 사다가 혼자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한달에도 몇권씩 여러가지 신앙/신학 서적들을 읽어나갔다. 하루에 몇시간이고 성경을 읽고도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처음 그렇게 읽었던 '한영 현대인의 성경' 책은, 곧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후에 대단히 격렬한 감정적인 반응이 따라오긴 했으나, 그것은 이성적인 프로세스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 나타난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만일 이 복음이 진리라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계관과 가치관이 모두 사상누각으로 허물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대단히 깊이 했었다. 그래서 소위 세계관, 신학과 철학, 역사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과 과목'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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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2) - 불연속적이지 않았다.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15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는, 어머니로부터 믿음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본격적인 '회심 경험'을 했던 것을 대학교 3-4학년 때로 보지만,(벌써... 20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군. ^^) 기본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 그리고 어려서부터 교회에 건성으로나마 나갔던 이력등이 있으므로, 아예 무신론자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것과 같은 경험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꽤 모범생이었다. ^^
어찌보면 상당히 답답한 모범생이었다. 대학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턱이 심하게 다쳤던 적이 있었다. 결국 찢어진 부분을 꿰메러 가면서도, 그것 때문에 수업을 빼먹어야 하느냐 하는 것을 꽤 깊이 고민했을만큼, '샌님'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드러나는 대단한 일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호위 '허랑방탕하게' 살아본적도 없었다. 

소위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던 경험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불연속적인 경험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뢰할만한 신'이 계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고,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영적세계가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매우 비뚤어진 형태이기는 했으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대해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고등학교때 세례도 받았었다!

회심 이전에도 모범생이었고, 회심 이후에도 그 모범생의 길로부터 심하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내가 회심의 경험을 했던 것이, 어떤 한번의 event라기 보다는, 대학교 3학년-4학년을 지나면서 넓게보면 2년, 짧게보면 몇달 동안의 기간에 걸쳐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이 찌릿한 경험을 했다거나, 입에 거품을 물었다거나(^^), 대단한 신비체험을 한것도 없었다. 그저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나를 사로잡는 경험을 하게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회심경험이, 특별히 종교적인 배경을 거의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회심체험을 하던 그 2년여의 기간은, 도무지 내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아마 앞으로의 글들에서 이런 부분을 더 다루게 되지 않을까...)

대단히 불연속적인 경험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매우 연속적으로 보일수도 있는 경험이었다고... 그렇게 애매하게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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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1) - 우리의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던가?

짧은 생각, 긴 글 | 2011.11.14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지난번 제주에서,
내 "기도멘토"인 동국이형과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정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머리 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동국이형이 "정말 우리의 경험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었던걸까?" 라고 자문했던 것이었다.

동국이형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복음을 타협하는 사람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살마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정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직면하는 경험을 하면, 그 사람의 본질부터 달라지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많이 부족하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을 한 이후에, 삶이 근본으로부터 달라졌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일까?
혹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좀 더 제한적으로 그 만남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우리와 같이 완악한 사람을 바꿀 수 있었는데, 왜 훨씬 더 선하고 좋은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정말 우리의 경험이 특별하다는 말인가?

동국이형과 그 이야기를 나눈지 거의 한달이 되어가도록, 내 머리속에서는 그 질문이 떠나질 않는다.

나는 그래서,
내 회심 경험을, 앞으로 몇편의 글들을 통해, 나름대로 분석적으로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지금 내가 신앙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객관화 될 수 있는 것인지,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무기가 아니라,
은혜와 사랑, 그리고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정리해보고 싶다.
잘 될른지는.... 글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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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긴 생각, 짧은 글 | 2011.06.30 06:00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내가 처음 복음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때,
처음 예수와 '관계'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두가지 중요한 혼란/변화가 내게 있었다.

정말 내가 새로 눈을 떠 알게 된 이것이 '진리'라면...
내가 여태껏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든 기초가 다 부정되는 것이었다.
그 엄청난 세계관의 변화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내 세상을 지탱하고 있었던 기둥 자체가 무너져 버렸으니...
그리고 여태껏 내가 기둥으로 인식하지 못하던 것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니...
정말 기뻤지만, 한편 말로 다 할 수 없는 혼란을 겪었다.
그래서 정말 거의 미친듯이 공부했었다. 성경을 줄쳐가면서 읽고, 각종 신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심지어는 여러가지 성경공부 교재들을 사서 혼자서 답을 달며 참고서 풀듯 공부를 했었다.
그러는 중 점차로 말씀과 함께 사는 삶이 체득되었던 것 같다.

두번째로,
정말 내가 새로 눈을 떠 알게 된 이것이 '진리'라면... 
내 모습 그대로의 '나'는 왜곡 투성이었다.
내가 그저 '괜찮다', '정상이다', 심지어는 '멋있다'고 여기던 내 모습은,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한 아주 심각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내 어그러진 모습을 고쳐나가는 일에 정신없이 매달렸었다.
잠깐 화가 나서 내 성질을 누르지 못하는 때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위해 나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때마다, '이런 내 모습을 고쳐주시도록' 참 많이 기도했다.
일상 생활 중에 잠깐이라도 짬이 나면 내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보며 참 많이 가슴아파했었다.
그러는 중 점차로 성화 과정을 겪어가는 것을 배워나갔던 것 같다.

그러나,
'교회 생활'이 익숙해 지면서...
'사명', '비전', '감동', '뜨거움', '개혁'... 등등과 같은 개념들이 점차 위의 내용들을 치환해나가는 것을 경험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교회생활을 하면 할 수록 내가 성경을 통해서 만났던 진리의 태양빛보다는... 종교생활이 가져다주는 네온사인에 익숙해져가는 것을 경험했다.
한때는 그것이 성숙의 과정인줄 알기도 했으나...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알게된 것은, 
나는 처음의 순수했던 '신앙 생활'을 버리고 '종교생활'에 오염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 코스타 집회를 통해서...
내게 주어졌던 그 순수한 열매들이 잘 회복되길...

그리고,
코스타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닮아가는' 영광스러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것이 그저 종교생활로 대체할 수 없는 얼마나 멋진 것인지...
보게되면 좋겠다.

현대 기독교가 제공하는 종교생활로부터 벗어나,
복음이 이야기하는 신앙생활로 회귀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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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 예수를 막 믿게되었던 시절

긴 생각, 짧은 글 | 2009.04.28 06:16 | Posted by 목수의 졸개 woodykos
나는 모태출석 교인이다.
어머니께서 나를 태중에 가지고 계실때부터 교회 출석을 했다.

내가 그 신앙을 내 개인의 것으로 받아들인것은 대학교 3학년때의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그 신앙을 깊이 곱씹어볼만큼 내가 넉넉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던 시절,
신앙이 없으면서 신앙이 있는 척 했던 시절,
진리에 대하여 목말라 했던 시절,
그리고...
그 진리를 막 발견한 직후 내 생각과 감정과 마음이 급속히 바뀌어 가던 신앙의 초기 단계...

이것들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희미해진다.

그래서,
내가 그 당시에는 매우 어렵게 받아들였던 개념이나 깨달음들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려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싶다.

기회가 되면,
내가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에 했던 고민들,
또 내가 막 예수를 믿은 직후에 했던 고민들만을 다시 깊이 곱씹어보는 시간을 좀 갖을 수 있으면 한다.

이 블로그에도 간단하게 그것들을 좀 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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