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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은혜란,정말 말로 안되는 개념이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그러면 안되는 개념이다.왜냐하면 은혜는, 그 이전의 모든 상태를 백지화해버리기 때문이다.그런의미에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억지라도 여겨질수도 있다.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은혜가 아니라면, 은혜가 아니라면...도우지 해결할 방법이 없었는데...도무지 도무지 해결될 방법이 없는 절망의 상태였었는데...주님께서 그렇게 은혜로 모든 것을 뒤집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우리 쪽에서의 반응 조차도 trivialize 시킨다. 은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엎드려 울며 그 은혜에 잠기는 것 뿐이다. 은혜에 걸맞게 살거나,은혜를 갚거나,심지어는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것 조차도... 불가능하다. 오늘 하루는,정말.. 더보기
갈망 비극적일만큼 절망적인 상태의 인간에게도,그 존재의 깊은 곳에서 부터 나오는 '갈망'이 있기 마련이다. 복음을 알기 전에도,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 어떤 소망, 어떤 그 무엇을 향한 깊은 목마름이 있기 마련이고,복음을 알고 난 후에도,그 신비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끊임 없는 갈망이 있다. 내가 복음을 알기 전,내 내면 속 깊은 곳에서 외쳐나오던 그 '갈망'을 깊이 오늘 하루 마음에 담고자 한다. 내 갈망은 무엇이었던가,그 갈망을 어떻게 채우려는 헛된 노력을 했던가,지금... 내 갈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주님을, 주님을...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그 상태에 오래 머물러 보고 싶다. 더보기
절망 "하나님 없는 인간은, 절대 절망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는 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상태이다. 아직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인간에게 주어진 이 절망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복음을 깨닫기 난 이후에는,복음을 알기 전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이었는지 망각하기 십상이다. 오늘 하루는,내 상태가 하나님 없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던가 하는 것에 깊이 immerse 되어보고자 한다. 아직 복음을 알기 전에,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였던가,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끊임 없이 반복되는 죄를 돌이켜보며... 지금도 나는 하나님 없이 얼마나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상태인가... 복음의 신비는,절망의 깊이를 제대로 perceive할때에야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더보기
고난 주간을 묵상하지 않기 (?) 매년 고난주간에는 나름대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려고 많이 노력을 했었고,내게 참 큰 유익이 있었다. 그런데,금년 고난주간에는,고난을 묵상하기 보다는, 고난을 그냥 마음에 담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그게... 좀 설명하자면 어려운데, 말하자면,고난이 어떤 것일까,그 고난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아팠을까,그 고난의 결과로 내게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가..등등의 '묵상'은 결국은 대단히 이성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 그 결과로 눈물도 나고 감격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감성적이 되기도 하지만,이런 묵상은 본질적으로 이성적 활동이다. 금년 고난주간에는 그런데,그런 '이성적' 접근보다는...그저 그 고난을 마음에 '담는' 것을 해보고 싶다. (too post-modern? ㅎㅎ) 이성적 과정이 .. 더보기
My Transitions (3) 4.내 네번째 transition은,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던 시기였다.(최근 그것에 대해 좀 쓰기도 했지만..) 대충 2002-2003년 즈음에 그런 transition이 있었는데,그 주된 내용은, 정복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회개, 그리고 Lordship에 대한 재정립 이었다. MIT라는 유명한 학교에서, 그것도 비교적 유명한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마쳐가면서,내가 세속적 성공/명예에 대한 것이 중독되듯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주로 대략 6개월-1년간의 QT 말씀이 나를 그런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던 것 같다. 정말 마음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프고 힘들었었다.정말 가슴에 불덩어리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었는데,그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오히려 복음의 가치와 충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