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n Ideal Life
세상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로부터 벗어나 어그러져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삶의 영역에서도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세상의 어그러짐은 그래도 둔채, 내 삶의 영역에 한해서만 "justice"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늘 내게 공평하지 못하고, 왜 내게 이런일이 라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 망가진 세상의 일부를, 내 삶으로 embrace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싶다. 너무 쉽게 내 삶의 영역의 어그러진 부분을 곧게 펴보려는 시도는,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그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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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뒤의 사람을 발견하는 일
유난히 극단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라던가, 특정한 생각의 흐름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사람, 혹은 다소 치우쳐 보이는 사상이나 믿음의 이야기에 '올인'해서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런 경우 대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매우 어렵고,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주 극단적으로 위와 같은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선호와 기호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때, 그 사람의 언어 뒤에 자리하고 있는 그 사람의 필요와 생각, 고민과 갈등을 알아내는 일이, 사람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가령, 유난히 신비주의적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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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이라는 '테크닉'
겸손이라는 성품만큼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덕목(virtue)가 많지 않는 것 같다. 진실하게 겸손한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그런의미에서, 겸손이라는 '테크닉'을 완전히 마스터할 수만 있다면, 소위 '처세술', '용인술', '화술', '대화술'등의 기술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겸손'은 거짓으로 꾸며내기 가장 어려운 덕목이라는 것이다. 섣부르게 가장한 겸손은, 오히려 거부감만을 불러일으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로 시작하는 빌립보서 2장 5절 이후의 본문은, 낮아짐과 겸손함의 basis가, 처세술이나 대화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임을 명확히 드러내는 멋진 구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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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내가 여러가지로 건강할 때에는, 내가 해야 하는 것을 즐겁게 하게 되는데, 내가 여러가지로 건강하지 못할 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에 탐닉하게 되는 것 같다.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약 15% 쯤 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약 85% 쯤 하고 있다. KOSTA 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약 5% 쯤 하는 것 같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95% 쯤 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해야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하나가 되면 제일 좋겠지만,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은 듯. 하고 싶은 일보다 몇배나 많은 해야하는 일들을 해나가며, 그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일이... 하고 싶은 일에 탐닉하며 얻는 shallow한 것보다 훨씬 더 joyful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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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이렇게 들들 볶으시는 겁니까!
박사과정 중에... 정말 일이 잘 안풀릴때... 도대체 왜 이렇게도 나를 들들 볶으시는거냐고 하나님께 참 많이 따졌던 것 같다. 이렇게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해보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딴지를 거시느냐고. 그러나,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마음의 깊은 계곡에까지 내려가게 하시고서는... 그곳에서 나를 만나주시는 경험을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어려움, 좌절, 고난, 아픔, 절망, 실망, 안타까움, 두려움등등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데, 그것이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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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와 엘리사
20대에는, 나를 끊임없이 점검해주고, 나를 보살펴주는 선배가 없는 것이 정말 눈물나도록 서럽고 힘든 때가 많았다. 복음에 눈을 떠서 가슴이 뜨겁긴 한데, 이것을 어떻게 handle해야 하는지 내게 일러주는 이가 주변에 별로 없었다. 물론 일반적인 조언과 가르침은 풍성하게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내가 '멘토'로 생각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정신없이 책을 읽기도 하고, 어쩌다 한번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무엇인가 배워보려고 갖은 노력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엘리사가되어, 엘리야와 같은 선배를 따르고 싶은 열망이었다. 30대에는, 그런 그림들을 대충 포기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어차피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므로, 기도와 말씀으로부터 공급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제 40대가 되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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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어제 글에서도 짧게 썼지만,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위로나 격려는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약자를 향한 compassion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고 세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생존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대비시켜 보면 이들은 참 멋지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소위 '개혁적' 젊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는, 약자들 (사회적 약자 뿐 아니라, 정서적, 신체적, 영적, 경제적 약자들을 모두 포함)을 향해... 기운을 내, 우리가 함께 하고 있잖아, 저기 고지가 보이잖아...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들을 자주 발견한다. (나도 매우 자주 그런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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